정치는 왜 나빠졌을까

입력
2022.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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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대립, 시민 분열을 넘어 이제는 증오와 저주가 지배하는 정치가 되었다. 정당들 사이도 그렇지만 같은 정당 내부는 더 심각하다. 같은 당의 동지(同志)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 사이를 지배하는 것은 비열함 이상이 아니다. 누군가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필자는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었고, 없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정치는 여야 사이에 있어야 했다. 리가 찬성과 반대 어느 한쪽보다는 그 사이에 있을 때가 많기에 토론과 협상이 가치를 갖듯, 정치도 마찬가지다. 공익에 가까운 판단은 여야 어느 편보다 여야 사이에 있을 때가 많기에 정치의 역할이 있는 것인데, 이를 경시했다. 누구에게도 인간의 완전함을 전제할 권리가 없다면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판단 역시 빈틈이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고, 그 빈 곳을 상대 당이 채우게 해야 정치가 모두를 위한 공공재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여야 어느 한쪽 시민들만 환호하는 민주주의를 추구했기에, 정치는 물론 사회도, 인간의 내면도 분열의 상처로 고통받게 되었다.

정당 내부도 다를 바 없다. 당내 다원주의가 정당을 전체적으로 더 책임 있게 만드는 토양이 되어주지 않으면 '정당 책임정치'라는 구호는 허상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을 존중했더라면 정견과 전략을 공유하기 위한 당내의 조율 노력 속에 정치가 있었을 것이다. 참모진들과의 성실한 준비 회의에서도 정치의 역할이 빛났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야심 있는 정치가들을 정당이 지향하는 가치 안에 묶어 두고, 그들이 책임 있는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낸 복수의 대안을 두고 시민이 최종적 심판자로서 주권을 값지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정치는 없었다. 있는 것은 자신이 옳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 여론을 동원하려는 자들의 원초적 권력 욕구뿐이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없었고, 독단과 억지 논리만 있었다. 승리만이 살길인 정치를 했다. 한쪽이 살면 다른 쪽은 죽어야 하는 정치였다. 그런 싸움에 편을 나눈 지지자들이 유튜브와 SNS, 문자와 전화, 팩스를 통한 '참여 행동'으로 소동을 일으키는 동안,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정당의 당직자들과 참모들은 물론 개별 의원 역시 공적 대의에 대한 헌신 대신 개인의 안위나 실리를 추구하는 풍토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상대와 마주해서 조정하고 협상하는 것도 아니고, 당내 구성원들 사이에서 협동을 조직한 것도 아닌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서로 등지고 돌아서서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향해 정치를 일상화하라고 선동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파괴하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연주자들이 아닌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 청중을 바라보고 지휘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면 연주자들도 청중을 위해 각자가 내고 싶은 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거대한 불협화음이 만들어질 텐데, 그러면 청중석의 한쪽에서는 이게 연주냐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쪽에서는 지금껏 이런 연주는 없었다며 환호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지휘자가 연주자들과 눈을 맞춘 연주로 청중에게 감동을 주듯, 정치가도 여론이 아니라 정당과 국회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다는 아니지만, 일단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