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내리 가파른 언덕바지 학교를 다녔다. '다리 하나는 튼튼해진다' '빙하가 다 녹아도 물난리 날 일은 없다' 등 친구들과 늘 한탄 섞인 농담을 해댔다. 그땐 몰랐다. 그 학교들이 진짜 물에 잠길 가능성이 매일매일 높아져 가고 있다는 걸. 인류에게 기후위기는 더 이상 내일의 과제가 아니다. 최근 소설이나 영화에 그런 설정이 자주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12월부터 부부 작가인 뱁새(글)·왈패(그림)가 네이버 웹툰에 연재하는 '물 위의 우리'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한반도 대부분이 물에 잠긴 후 혼란한 사회가 배경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일곱 살 여자아이 '한별'이 아빠(호주)와 함께 아빠의 고향 마을 양지로 이사하면서 시작된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호주가 외지인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한편, 한별은 처음 친구를 사귀며 동화 같은 장면들을 만들어 간다.
납득할 만한, 현실적 세계관이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든 만화든 독자가 '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작가가 이긴 게임이 되기 마련이다. 보트 밑으로 바다에 잠긴 고층 아파트 단지 모습을 보여준 한 컷(1화)만으로도 웹툰 배경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또 '고도가 높은 강원도와 태백산맥에 전 국민을 수용할 대규모 이주 시설을 준비했지만 강원도(정부)가 모두를 배신한다'는 설정만으로도 몰입감이 높아진다. 빠르게 물이 차오르자 자원을 독점하려는 세력이 생기고, 생존을 명목으로 비정한 길로 들어서는 자유주의자(무법자)와 온건주의자로 인류가 나뉘는 구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최근 판매량 10만 부를 돌파한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도 생각난다. 생물을 순식간에 죽이는 '더스트'가 지구에 내려앉은 2058년과, 그로부터 약 70년 뒤인 2129년 더스트를 없애고 재건에 성공한 지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여기서도 더스트를 막아낼 수 있는 '돔 도시' 안에서 권력 다툼과 그 밖에서 생존을 위해 벌어지는 갈등 등이 계속된다. '대재앙에 직면한 인간은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혹은 반대로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나)'는 동서고금을 넘어선 뜨거운 논제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추리 소설과 같은 서사 방식도 재미를 더한다. '호주'가 고향 마을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읽고 촌장인 친구 '선원'에게 "마을에 뭔 짓 했냐?"고 묻는 장면은 미스터리 추적의 시작을 알린다.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시골 마을에 찾아간 도시 청년이 마을의 비밀을 추리해가는 웹툰 '이끼'와도 닮았다. 독자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기에 딱이다.
양지 마을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이와 연결된 전체 세력 간의 갈등 구조도 드러난다. 세력은 지역을 기준으로 갈린다. '한별'의 고향이자 '호주'가 오랜 기간 살아 온 '잠실'(물에 잠기지 않은 거대한 고층 빌딩의 상단부로 그려진다)은 당초 서해 바다 아래 연구 시설과 강원도 이주 시설을 잇는 중심지로 낙점됐던 곳이라 보유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여기에 남산 관악산 북한산 월악산 등을 근거지로 삼은 각 세력들이 힘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출신지 불명의 무법자 집단의 활동 반경이 일반 마을로 퍼져가면서 이 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각 세력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지가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다.
비극적 설정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귀여운 작화도 인기 요소다. 주인공 한별이 마을의 또래 친구들과 사귀는 과정을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친구를 처음 사귄 한별이 '친구들이랑 운동하기' '별명 지어주기' 등 자신의 소원을 적은 공책 수십 권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컷이나 한별을 경계하던 마을 아이들이 어느새 한별을 위로해주는 컷 등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은 극 전체의 긴장을 적절히 완화해준다. 일종의 아포칼립스(종말) 시대물이지만 동심을 갖고 희망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다. 덕분에 웹툰을 너무 무겁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이는 5회 분량 정도를 선공개하는 '네이버웹툰 최강자전(2020년)'에서 높은 득표 수로 최우수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도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