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5) 선수를 3년여에 걸쳐 성폭행한 조재범(41) 전 국가대표팀 코치에게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 등 치상)등 혐의로 징역 10년 6개월을 선고한 1심 재판부 판결문에는 '그루밍(Grooming) 성범죄'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었다. ‘그루밍 성범죄’란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조씨 측은 항소심에서 "조씨와 심 선수는 이성관계로 만나 성적 접촉을 했다"며 '그루밍 성범죄'를 부인했지만, 사법부는 조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2심 재판부는 조씨 주장이 2차 가해를 불러왔다고 보고 1심보다 형량을 높여 징역 13년을 선고했고, 대법원 역시 원심을 유지했다.
조씨 사건처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는 '그루밍' 수법이 자주 나타나지만, 현재 형사사법체계에선 범행을 입증하고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6년간(2014~2019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재판부가 성범죄사건(299건) 중 그루밍이 있었다고 판단한 비율은 5.3%에 불과했다.
법조계에선 '그루밍 성범죄'의 특수성이 입증을 어렵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피해자에게 신뢰를 주면서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와 맺는 성관계를 합의로 착각하거나 범죄로 인식하지 못해 침묵하게 된다. 이현숙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대표는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15세 여중생을 성폭행하고도, 문자메시지와 편지를 근거로 '사랑'으로 간주돼 2017년 대법에서 무죄가 선고되지 않았나"라며 "폭행과 협박이 없는 성범죄라 암수범죄(발생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는 범죄)나 다름없다"며 법원의 적극적 해석을 촉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 뒤에 수면 위로 떠올라 증거수집과 법리 적용이 쉽지 않은 점도 '그루밍 성범죄'의 특징으로 꼽힌다. '제주 어학원 성폭행 사건'을 맡았던 정수정 검사는 "그루밍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5년이 지나 증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며 "피해자 진술을 끊임없이 분석해 어렵사리 기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n번방(박사방)’ 사건 등 미성년자 성착취 문제로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상향됐고(만 13세 미만→만 16세 미만) △온라인 그루밍 처벌법(사법경찰관의 위장수사 가능)이 통과되는 등 다양한 법안이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재판부가 '그루밍 성범죄'를 규명할 수 있도록 피해자를 배려한 사법 환경이 우선적으로 조성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가 피고인 동의 없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영상을 증거로 인정하는 것에 제동을 걸면서, 피해자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2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커졌다.
법무검찰개혁위원을 지낸 오선희 변호사는 "아이들이 어리고 피해가 클수록 피고인이 출석한 법정은 중압감을 유발해 제대로 진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며 "피고인 반대신문 때문에 피해자가 법정에 나올 필요가 없도록, 재판 전 피고인의 반대 신문권을 보장하는 절차를 마련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의 영상녹화가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보완입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