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가 2018년에 이어 또다시 대세 하락의 시점을 맞았다. 지난해 11월, 약 6만9,000달러로 고점에 달했던 비트코인은 현재 2만 달러에서 버티고 있다. 이더리움은 4,900달러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1,100달러 선에 머물고 있다. 5월 중순, 한국산 코인 테라와 루나가 붕괴한 후, 암호화폐 시장의 윤활유 역할을 하던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 업체들이 줄줄이 위기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암호화폐의 겨울(crypto winter)'이다.
암호화폐 업계의 대형 투자자와 명사들은 여전히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를 신봉한다. 한때의 충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 2017년 말 비트코인이 2만 달러에 육박했다가 하락했을 때 비관론이 쏟아졌지만, 결국 비트코인은 버텨내 다시 상승했다.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암호화폐가 여럿 등장하면서 시장 전체의 덩치도 커졌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하고 국가 예산으로 매입한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차트를 그만 보고 인생을 즐기라"고 썼다.
하지만 이번 암호화폐 하락세에는 과거와는 다른 양상도 보인다. 당시의 하락이 주로 비관론의 영향을 받은 개인 투자자들의 매도세에서 비롯됐다면, 현재의 충격은 '디파이(탈중앙화 금융)' 간 연결고리에 의한 구조적 양상을 띠고 있다. 또 암호화폐를 지지하는 주요 논거였던 '안전자산'과 '탈중앙화'의 환상이 사라지면서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실망도 커지고 있다.
이번 암호화폐 하락세의 1차적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움직임이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후 금융 시장이 충격을 받자 대대적으로 돈을 풀었던 연준이 올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긴축 정책으로 돌아섰다. 지난 3월 0.25%포인트에서 5월엔 0.5%포인트에 이어 6월엔 0.75%포인트까지 속도도 더 높이고 있다.
암호화폐 최대 거래소 중 하나인 FTX의 샘 뱅크먼프리드는 지난 19일 미국 공영라디오 NPR와의 인터뷰에서 "암호화폐 하락의 핵심 원인은 연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격적 금리 인상으로 인해 위험에 대한 전망이 재조정됐고, 시장은 공포에 질려 있다"면서 "향후 암호화폐 시장의 사업성은 모두 연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2018년의 하락 역시 2017년에서 2018년 사이 이어진 금리 인상 드라이브에 그 원인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런데 암호화폐 시장이 금리 인상에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가 '위험자산'임을 의미한다. 이는 그동안 일부 비트코인 지지자들이 주장해 온 것과 배치된다.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암호화폐가 연준과 같은 중앙 통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화폐이며, 법정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가운데 유력한 자산 도피처라고 주장해 왔다.
물론 현실은 정반대였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1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찍은 5월에 암호화폐 시장은 테라·루나 사태의 충격에 휘청였다. 뉴욕대 상하이캠퍼스의 로드리고 지단 교수는 "미국 CPI와 비트코인의 가격 상승률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면서 "비트코인을 인플레이션 회피 자산으로 거론하는 것은 거짓 주장"이라고 말했다.
이번 암호화폐 시장 충격은 암호화폐 자체에 대한 투기적 수요 감소뿐 아니라 디파이 업체의 연쇄 붕괴로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의 블록체인 기업인 테라폼랩스가 발행해 '한국산 코인'으로 불리는 스테이블코인 테라USD(UST, 통상 테라로 불림)와 암호화폐 테라(LUNA, 통상 루나로 불림)가 동반 붕괴했을 때만 해도 이는 특정한 코인의 위기로만 인식됐을 뿐이었다.
하지만 '디파이 대부 중개업체'인 '셀시어스 네트워크'와 '바벨 파이낸스'가 줄줄이 이체와 출금을 중단했다. 디파이 대부 중개업체란 쉽게 말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높은 이율로 맡기고 대출하는 과정을 중개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암호화폐 시장의 헤지펀드인 '쓰리 애로우 캐피털(3AC)'은 '블록파이'와 '보이저' 등 다른 대부업체로부터 암호화폐를 빌려 테라에 투자했다 대규모 손실을 입고 사실상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블록파이와 보이저 역시 연쇄 위험에 노출됐으나, FTX의 구제를 받고 일단 정상 가동을 이어갔다.
셀시어스와 바벨, 3AC의 공통점은 테라 충격에 더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이 동반 하락세를 보이면서 과도하게 잡은 담보 비율로 인해 유동성 압력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14일 공개한 보고서를 통해 "디파이 대부업체들은 견조한 대출을 진행하기보다는 투기 수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면서 "암호화폐 시장에서 채무자의 정보를 알기 힘들다는 근원적 불투명성 때문에 경기순응성이 강해진다"고 분석했다. 경기순응성이란 시장이 상승세일 때는 번성하지만 하락세에 빠질 때는 위기에 빠지기 쉽다는 의미다.
이번 붕괴에서 암호화폐 시장의 또 다른 문제로 떠오른 것이 '리더 리스크'다. 통상 암호화폐나 탈중앙자율조직(DAO) 등 블록체인 조직은 주인이나 지배자가 없고, 체인 참여자들이 동의한 정책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당연히 리더십은 있고, 그 리더십이 '공동체'와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오만하고 일방적 운영을 하는 양상이 암호화폐 시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첫손에 꼽을 인물은 단연 테라와 루나의 발행과 운영을 주도해 온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다. 권 대표는 테라 공동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폭락한 테라를 구제하기 위해 기존의 UST와 루나를 '테라 클래식 USD(USTC)'와 '루나 클래식(LUNC)'으로 전환하고 테라 2.0(루나 2.0)을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코인 발행에 반대한 '루나 클래식' 보유자들은 루나 2.0이 루나와 UST의 대량 보유자인 고래(큰손)들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눈속임이라고 주장했다.
셀시어스의 설립자인 앨릭스 마신스키 또한 권 대표와 비슷한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셀시어스는 12일 돌연히 "시장 불확실성" 때문에 인출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는데, 마신스키는 바로 전날인 11일까지만 해도 "셀시어스는 수십억 달러의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다. 위기는 없다"면서 "FUD(공포, 불확실성, 의문)와 거짓정보를 그만 퍼트려라"라고 주장하고 있던 터였다. 마신스키는 평소 "은행을 떠나라(Unbank Yourself)" "월가로부터 부를 빼앗아 와라" 같은 '민중적'인 구호까지 내걸며 탈중앙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해 온 인물이라 배신감이 더욱 컸다.
이처럼 암호화폐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대부분의 암호화폐 거래소와 스테이블코인은 과도하게 중앙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암호화폐 시장 특성상 규제당국에 대한 보고 의무도 없기 때문에 시장의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상태다.
투자자들 또한 혼란에 빠져 있다. 스테이블코인 '테더'에서는 지속적으로 자금이 유출되고 있는데, 이는 테더가 여러 차례 안정성 증명을 시도했음에도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장에서 테라나 셀시어스처럼 안정성을 호언장담했다 붕괴 위기에 몰린 전례가 있기 때문에 테더 역시 투자 심리를 되돌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BIS는 지난 21일 공개한 연례보고서에서 "암호화폐 시장의 활동은 기존 금융 시스템과 동일한 수준의 규제가 필요하다"면서, 특히 테라의 붕괴를 예로 들어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강력한 감독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암호화폐계의 큰손들도 덩달아 규제를 외치고 있다. 비트코인 애호가인 마이클 세일러 마이크로스트레티지 최고경영자(CEO)는 22일 유튜브에 출연해 "4,000억 달러 규모의 불투명한 거래가 이뤄지는데 비트코인이 여기에 담보 자산으로 묶여 있다"면서 "3AC 같은 불투명한 헤지 펀드가 암호화폐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