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엔저 현상이 갈수록 수위를 더하면서 '저금리' 기조를 고집스레 유지해온 일본 당국이 정책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치솟는 물가를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 있는 데다 금융자본의 해외 유출 가속화 같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외환 시장에서 엔화 환율은 달러당 136엔대 후반까지 올라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주 달러당 135엔을 넘어선 지 1주일 만에 고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엔화 가치 하락은 미국의 발빠른 금리 인상에도 일본은행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일본은행은 지난 17일 열린 금융정책회의에서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는 등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엔저 현상을 감수하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이 확대를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행이 저금리 기조를 고집하는 것은 정부의 국채이자 부담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막대한 적자국채를 찍어 시중에 돈을 풀어댔는데, 당장 갚을 돈이 없는 탓에 만기를 맞는 대부분의 채권을 재발행하고 있다. 기준금리를 높이면 재발행 채권의 이자율을 높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고민이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1,000조 엔(약 9,700조 원)을 넘어섰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1∼2%포인트 올리면 정부의 연간 원리금 부담액은 3조7,000억∼7조5 ,000억 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엔화 가치가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자 정부와 일본은행의 태도 변화를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최근의 엔저 현상은 우선 자금 이탈 등 금융불안을 키운다. 또 수십 년간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만큼 저물가에 익숙해진 일본 경제에 경험해 보지 못한 물가 급등 충격을 안길 수 있다. 오랜 디플레 학습 효과로 일본 당국은 어느 정도의 물가상승을 오히려 반기는 입장이지만, 비정상적인 물가 급등은 서민층에 갑작스러운 고통을 떠안길 수 있다.
고노 류타로 BNP 파리바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에 "일본과 미국의 금리 차 확대로 엔달러 환율이 140엔대가 지속되면 물가 상승률이 3%를 넘어설 수 있다"며 "여론에 밀려 일본은행이 연내 정책 기조를 수정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야마카와 데츠시 버클레이스 증권 조사부장도 “엔·달러 환율 급등으로 현재 금융정책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 정부도 엔저 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21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구로다 하루이코 일본은행 총재가 만나 금융시장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회동 직후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일본은행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하겠다"며 외환시장 개입 의사도 피력했다. 다음달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고물가는 정부·여당에도 부담이라, 일본은행이 금융정책 기조를 바꾸라는 압력을 더 크게 받게 될 수 있다고 닛케이는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