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 샤피로는 전 세계 벤처투자업계에서 유명한 거물이다. 페이스북에 초기 투자해 큰돈을 벌었고 남들이 외면하던 세계적 크라우드 펀딩업체 킥스타터에도 초기 투자해 성공하며 남다른 안목을 과시했다. 그런 그가 신생기업(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2010년 창업한 벤처투자업체(VC)가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다.
그가 만든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는 독특하다. 무조건 돈이 될 만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곳들만 골라서 투자한다. 그런 관점에서 공유차량 서비스 쏘카,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체 렌딧 등 국내 스타트업에도 투자했다.
콜라보레이티브 펀드가 관심을 끄는 또다른 이유는 고 김정주 넥슨 창업자가 투자 파트너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고인은 미국에서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를 통해 다양한 투자를 하며 스타트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는 국내 스타트업들 사이에 더 주목을 받았다.
콜라보레이티브 펀드가 다음 달 국내에 상륙한다. 서울에 아시아 총괄지사를 설치해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체의 스타트업 투자를 담당한다. 미국 VC가 국내에 지사를 설치하고 본격 투자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사 설립차 방한한 콜라보레이티브 펀드의 브라이언 장(장근영, 33) 아시아 총괄대표를 만나 투자 계획을 들어봤다.
샤피로 회장이 2010년 미국 뉴욕에서 창업한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는 개인과 세상의 발전(better for me, better for the world)에 기여하는 투자를 목표로 한다. "즐겁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자를 하죠. 그래서 환경과 공유경제 등에 관심이 많아요."
즐겁고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한 투자란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린 샤피로 회장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직접 그린 손그림을 올려 놓았다.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고 세상을 발전시키는 두 가지가 교집합을 이루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죠."
샤피로 회장과 장 대표는 세계 경제가 공유경제로 흘러간다고 본다. "요즘 사람들은 소유보다 이용 경험을 우선하죠. 미국 젊은이들은 원격근무를 하면서 어디 사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소유 개념이 약해지면서 자동차도 사지 않아요. 대신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를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타죠."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는 환경, 음식, 금융, 건강, 교육 등 5가지 분야의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한다. 환경 분야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재생에너지 스타트업 등에 투자한다. 대표 투자처가 댄덜라이언이다. "댄덜라이언은 재미있는 환경 스타트업이죠. 집 옆에 땅을 뚫어 지열로 냉난방을 해결하는 스타트업입니다."
음식 분야에서도 같은 관점으로 투자한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가축 대신 식물성 대체육을 개발하거나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블루보틀과 대체육 개발업체 비욘드미트에 초기 투자했죠. 블루보틀은 특별한 커피로 한 단계 나은 경험을 제공해요. 블루보이 네슬레에 약 1조 원에 팔렸고 비욘드미트가 나스닥에 상장되면서 큰 수익을 얻었죠."
금융에서는 국내 스타트업 렌딧처럼 금융 서비스의 혜택을 넓히는 스타트업들이 대상이다. "투자한 금융 스타트업 중 흥미로운 곳이 롱텀스탁 익스체인지입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승인을 받고 1년 이상 주식에 장기투자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새로운 주식거래소를 만드는 곳이죠. 단타로 시장과 회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견실하게 회사를 함께 키워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만큼 장기 보유할 만한 회사들을 발굴해 거래종목으로 올려요."
건강 분야에서는 최근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미국 기업들은 좋은 인재를 유치하려면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정신건강 분야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한국인이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아미라는 스타트업에 투자했어요. 기업들과 계약을 하고 직원들의 심리 상담을 통해 정신건강을 관리해 주죠. 조만간 국내에도 들어올 예정입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아이와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스타트업이 투자 대상이다. 펀드에서 투자한 미국 장난감 스타트업 러브 에브리가 대표적이다. "신생아부터 만 5세 아이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책과 장난감을 만들어요. 삽화에도 다양한 인종과 장애인들을 그려 아이들이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죠."
투자 대상은 인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찾는다. "창업자들과 펀드 투자자들이 추천을 많이 해요. 그래서 인맥과 기업 평판이 중요하죠."
투자 과정은 다섯 단계로 이뤄진다. 우선 관심 있는 스타트업과 만난 뒤 사내 투자팀과 1차 회의를 한다. 회의에서 제시된 의문점을 확인하기 위해 서류 실사 및 스타트업 창업자와 논의를 한다. “미국이 지역이 넓어서 사내 투자팀 회의나 창업자 미팅을 주로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하죠.”
실사 결과가 나오면 투자팀과 2차 회의를 해서 대상 기업의 투자 가치와 투자 규모를 결정한다. 이를 토대로 창업자에게 투자 제안을 하고 조정을 거쳐 투자를 마무리한다. "전체 직원 20명 가운데 투자팀이 7명입니다. 투자팀 회의에 샤피로 회장도 참여하죠."
최종 투자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4~6주다. 한국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는 미국 본사보다 빠를 수 있다. "투자팀을 대신해 저만 만나면 되기 때문에 과정이 줄어들죠."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지금까지 조성한 펀드는 모두 5개다. "현재 다섯 번째 스타트업 투자 펀드를 운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VC들이 동시에 여러 개 펀드를 운영하지만 미국 VC들은 하나의 펀드가 종료돼야 새로운 펀드를 시작해요."
다섯 번째 스타트업 펀드의 규모는 약 1,600억 원(1억2,500만 달러)이다. "미국 VC 기준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펀드 중 중간 규모죠. 한국에서는 여기에 성장 펀드나 암호화폐 투자펀드 등을 더 투입할 수 있어요."
장 대표는 올해 한국에서 5~10개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한국에서는 유연하게 초기 스타트업뿐 아니라 오래된 스타트업에도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5가지 분야 외에 특별한 분야를 더 찾아 투자할 생각이다. "한국은 음악, 영화 등 콘텐츠 분야에 강점이 있어요. 성공 사례가 많아 이 분야가 한국의 특성 분야라고 생각해요. 또 전자상거래, 금융기술, 블록체인 기업들에도 관심을 갖고 있죠."
장 대표는 "한국에 블록체인 인재들이 많아 흥미롭다"고 강조했다. "암호화폐 테라와 루나 사태 때문에 한국 블록체인 업체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수 있어 안타까워요. 반면 VC 입장에서는 기업가치가 떨어지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 투자할 수 있어 좋은 기회죠. 미국에서도 실력 있는 개발자들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쪽으로 많이 옮기고 있어 앞으로 유망한 분야로 봐요."
장 대표가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대표다. "사람이 가장 중요해요. 그동안 어떤 일을 했고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차렸는지 보죠."
대표가 뛰어나면 사업 아이디어가 부족해도 투자한다. "현재 시장 규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시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의 능력이 중요해요. 지금은 시장이 작아도 앞으로 키울 수 있다면 이를 더 좋게 보죠. 지금 시장이 크면 오히려 경쟁이 심해서 자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에 불리해요."
대표의 실행력도 중요한 판단 요소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어요. 아이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실행하느냐가 중요해요."
장 대표는 사람 때문에 투자한 사례로 친환경 에너지 스타트업 아모지를 꼽았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공부한 우성훈 대표가 미국에서 창업한 암모니아를 이용해 수소 에너지를 만드는 스타트업이죠. 전혀 만난 적 없는데 회사 소개 메일을 보냈길래 읽어보고 명확한 사업 아이디어와 실행 방법에 흥미를 느껴 지난해 투자했죠."
장 대표가 사람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김정주 넥슨 창업자와 인연도 작용했다. 고인은 미국에서 샤피로 회장과 장 대표를 자주 만났다. "고인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불쑥 전화를 자주 했어요. 세상을 떠나기 한 주 전에도 샤피로 회장과 통화했죠."
그의 기억에 고인은 특이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여기에 뛰어든 창업자들을 존중했다. "로봇, 우주산업, 특이한 음식 등에 관심이 많았죠. 곤충으로 만든 영양식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고 주변에 많이 소개했어요."
특히 고인의 관심은 10, 20년 뒤를 향했다. "고인에게 콜라보레이티브 펀드를 통해 투자한 스타트업들에 왜 투자했는지 물었어요. 고인은 투자한 스타트업이 망해도 해당 업체의 기술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10, 20년 뒤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의미 있는 투자라더군요. 수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투자자들과 생각이 달랐어요."
장 대표는 고교 1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경제경영학을 전공한 뒤 투자은행 UBS에 취직했다. "UBS에서 스타트업 포럼을 개최하면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졌죠."
이를 계기로 그는 VC들이 스타트업의 성장성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스타트업 메터마크에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거기서 3년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VC들을 알게 됐죠."
이후 VC인 소셜캐피털로 이직했다. 그때 샤피로 회장과 김정주 넥슨 창업자를 만나면서 지금의 회사로 옮겼다. "샤피로 회장의 투자 철학에 크게 공감했어요. 그가 투자한 스타트업들은 평소 관심을 많이 가졌던 곳이죠. 여기에 김정주 넥슨 창업자와 일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았죠."
특히 샤피로 회장이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도 장 대표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국인이 창업한 미국 VC 중에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곳은 많지 않아요. 한국 스타트업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샤피로 회장은 한국이 좋은 시장이라고 생각해 한국에 투자할 기회를 찾고 있어 흥미로웠죠."
요즘 미국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스타트업 투자 열기가 식고 있다. "미국은 확실히 투자 침체기입니다. 미국 VC들이 지난해 모아 놓은 투자금이 사상 최대인 250조 원입니다. 하지만 총알이 많아도 신중하게 고르는 분위기로 바뀌며 스타트업 투자가 가라앉고 있어요. VC들은 내년에도 투자 한파가 계속될 것으로 봐요."
결국 스타트업들은 투자 혹한기를 견뎌야 살아남는다. "이제 스타트업들은 버티는 것이 중요해요. 투자를 받을 수 있으면 최대한 받아 놓고, 자금이 충분하지 못하면 비용을 줄여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성장을 조금 늦추더라도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요. 무조건 성장만 추구하면 자본이 고갈돼 고사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장 대표는 스타트업 투자를 이어갈 생각이다. VC들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스타트업에서 찾기 때문이다. "투자로 세상을 바꾸는 교두보가 되고 싶어요. 우리의 투자 철학이 영감을 줘 좋은 스타트업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