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문 전 대통령 괴롭히는 악성 시위, 메르켈 집 앞엔 없었다... 왜?

입력
2022.06.20 04:30
17면
신은별 한국일보 베를린 특파원이 가보니 
욕설∙소음 끊이지 않는 文 양산 집 앞... 
메르켈  베를린 집 앞엔  새소리만 들렸다
"공과 사 구분, 독일에선 상식의 영역"

11일과 1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집 앞. 도심을 가로지르는 슈프레 강을 끼고 있는 그의 아파트 주변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관광객들이 이따금 그의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경남 양산 평산마을의 문재인 전 대통령 집 앞과 확연히 달랐다. 시위대가 내지르는 욕설도, 대형 스피커에서 울리는 귀를 찢는 소음도 없었다. '레임덕 없이 물러났으나 재임 기간엔 유권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최고지도자'란 점은 문 전 대통령과 메르켈 전 총리가 같지만, 퇴임 후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베를린 중심' 메르켈 아파트... 시위대는 없었다

메르켈 전 총리의 집은 베를린 중심부에 있다. 총리 재직 기간에도 관저가 아닌 본인의 아파트에서 소박하게 산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던 터라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베를린의 대표적 집회∙시위 장소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겨우 1.5㎞ 떨어져 있지만, 집회∙시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파트 옆 건물에 사는 마리(Marie)씨는 "이사 온 지 3개월 됐지만 집회∙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같은 날 문 전 대통령 집 앞은 시끄러웠다. 지난달 10일 퇴임 이후 양산 집 앞에선 소음이 멈춘 적이 없다. 문 전 대통령이 이사하기 전까지는 새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곳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 닷새째 화를 냈다. "'반지성'이 작은 시골마을 일요일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 집 앞에서 집회·시위를 할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구멍 뚫린 한국 집시법이 원인? 野, 개정안 대거 발의

문 대통령 부부와 이웃 주민들이 소음에 시달리는 이유를 놓고 정치권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구멍이 있다"는 점을 꼽는다. 집회·시위를 규제할 근거가 모호하고, 특히 전∙현직 대통령 집 앞의 소란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혐오 발언 혹은 언어 포격) 금지법'의 부재를 탓하는 시각도 있다. 일본과 독일∙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인종∙국적∙지역∙성별∙장애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집단을 공개 모욕하는 행위를 강력 처벌하지만, 한국은 미온적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의 친문재인계 의원들은 문 전 대통령의 조용한 노후를 지키겠다며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독일 법이 강력해서? 메르켈이 인기 많아서?

다시 독일로 돌아가 보자. ①메르켈 전 총리 집 앞이 조용한 건 독일 제도가 꼼꼼해서일까.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을 통해 국회도서관이 조사한 독일 입법례를 확인한 결과 그렇지 않았다.

주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독일은 집회·시위의 자유에 더 열려 있다. 평화롭게 집회·시위를 할 권리가 보장되고, 집회∙시위를 사전 신고해야 하지만 허가를 받지는 않아도 된다. 의회∙헌법재판소 등 일부 기관이 집회 금지 구역에 속하긴 했지만, 전∙현직 대통령 집 앞은 독일에서 집회·시위 규제 지역이 아니다. 단, 집회∙시위가 누군가를 괴롭힐 것 같으면 법원이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점은 한국과 유사하다.


메르켈 전 총리 집 앞에서 24시간 보초를 서는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집회·시위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만 집회·시위가 길어지면 경찰이 제지한다. 집회·시위자들도 즉각 물러날 것이다. 이곳은 메르켈 전 총리의 '집'이기 때문이다."

②메르켈 전 총리가 대체로 사랑받은 지도자여서 집회·시위가 없는 건 아닐까(여론조사기관 입소스의 지난해 8월 조사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67%였다). 그러나 역시 틀린 가정이었다. 메르켈 전 총리보다 지지율이 낮은 올라프 숄츠 현 총리의 사저가 있는 지역에도 가봤지만, 집회·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입소스가 올해 5월 실시한 숄츠 총리 지지율은 20%에 그쳤다).

그의 주거지를 관할하는 포츠담 경찰서에서 만난 경찰도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집회·시위가 열리지만,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여긴 숄츠 전 총리의 '집'이기 때문이다."


"안 하는 게 상식"… 다만 '사회적 배경 차이' 고려해야

숄츠 총리 집 근처에서 만난 독일인 울리(27)씨에게 취재 취지를 설명하며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 속 남성은 흥분한 채 욕을 하고 있었다. 울리씨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독일에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한다. 집회·시위는 '공적인 공간'에서만 한다. 전직 대통령이라 해도 사적 영역을 보호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독일의 상식인가'라고 되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장은 19일 한국일보에 "독일에서는 1990년대 후반까지 정치인의 사생활이 기자∙시위대 등으로부터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치인'과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고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사회적 인식이다. 즉, 공과 사를 섞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전직 대통령의 기본권 보장을 당연시하는 '독일의 상식'을 한국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다. 독일 정치 분야 전문가들도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오렐 크로이산트 하이델베르크대 교수는 한국일보에 "독일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온건함·합리성·상대 존중을 중시해 왔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 집 앞의 사정에 대해서 그는 다른 해석도 덧붙였다. "한국의 민주화 투쟁,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 시위 등을 고려해 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런 습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19일에도 문 전 대통령 집 앞에는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