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유예했던 슬픔, 곡조로 흘려보내다 [마음청소]

입력
2022.06.16 14:00
<9> 사별가족 음악심리치료 체험기

편집자주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 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괜찮은데, 엄마와 이모가 걱정돼요."

얼마 전 외할머니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아흔이 넘었고 오랜 지병이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모를 잃은 아픔에 휩싸인 직계 가족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애도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애도상담'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 중 '사별가족을 대상으로 한 음악심리치료'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탓에 무선이어폰조차 없다. 그러나 낯선 분야라서일까. 오히려 흥미가 생겨 바로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기자가 받은 프로그램은 '회복중심 음악심리치료'로, 음악 감상을 통해 유도된 심상을 표현하는 작업을 거친다. 감정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나아가 일상생활로의 건강한 복귀를 돕는 게 목표다.

낯선 색소폰 연주에 잊고 있던 고인과의 추억 떠올라

10일 서울 은평구 증산동에 위치한 음악치료기관 '카운셀뮤직'을 찾았다. 방문한 시간은 영유아 및 미취학아동이 주로 오는 때여서 아이들 목소리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기관 내부의 따스한 연분홍색 인테리어가 긴장을 풀어주었다. 원래 5회기 이상을 듣는 게 맞으나, 일정상 3회기로 압축해서 듣기로 했다.

첫 회기인 만큼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한 뒤, 고인과의 관계 및 추억을 전반적으로 되짚었다. 약 10세까지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였던 까닭에 외조부모가 상경해 당신의 외손자를 키웠다. 고인은 '차분하고 선하고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잠시 호흡을 고른 뒤 김은정 카운셀뮤직 대표는 음악을 들으며 고인을 떠올려 보라고 안내했다. 그때 흘러나온 음악은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폴 윈터의 1983년 발매곡 '선 싱어(Sun singer)'였다. 약 4분 동안 눈을 감고 평소 듣지 않던 색소폰 연주를 감상했다.

음악을 듣던 중 치료실 창문 너머에 파마 머리를 한 할머니가 보였다. 음악치료를 받는 손자를 휴게실에서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자 까만 머리 시절의 고인이 떠올랐다. 늘 따스한 미소로 돌봐줬던 고인의 모습. 직장을 다녀 바빴던 엄마 대신 함께 목욕탕과 병원을 가줬던 모습. 자식과 손자를 돌보며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겼던 모습.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입관식 이후로는 처음으로 울었다. 사실 주변에서 "사별 이후 괜찮냐"는 질문에 늘 "나는 괜찮은데 엄마가 걱정된다"라고 답했다. 언제나 엄마와 이모를 먼저 챙기고 걱정하느라 무의식적으로 슬픔을 유예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나니 괜히 마음이 시원해졌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랑해줬던 기억

12일 두 번째 회기를 위해 또다시 기관을 방문했다. 김 대표와 대화를 하던 중 이모가 고인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늘 점잖았다고 생각했는데, 노인대학을 가 보니 할머니가 제일 흥이 넘치게 노래를 부르고 계셨어."

김 대표에게 고인이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좋아했다고 말하니, "아마 '여자의 일생'을 좋아하셨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세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가사로 인기가 많았던 노래다.

또 한번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 하고/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아 참아야 한다기에/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김 대표는 고인의 힘들었던 과거보다는 고인이 좋아했던 것들, 고인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려 보라고 안내했다. 이번에는 한국 가곡 '마중'이 흘러나왔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그립다는 것은 오래 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눈을 감으며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미취학 시절의 기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고인이 뭘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김 대표는 "그럴 수 있다"며 "고인과의 관계 및 이별로 인한 내 마음을 따라가 보면 된다"고 했다.

이에 스케치북에 내면 세계를 파스텔로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동그란 원이 있었다. 무해한 마음을 초록색 잎사귀와 뭉게구름으로, 또 순수함을 천사 이모티콘으로 나타냈다. 그러면서 어둡고 힘들고 괴로운 속내를 갈색,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상충되는 그 사이를 회색지대로 그렸다. 원 밖에는 빨간색 악마를 그렸다. 내면을 괴롭히는 외부 자극이다. "고인의 선한 성정을 물려받은 것 같으나 여린 탓에 각박한 현실에서 오는 외부 공격을 잘 방어하지 못하고 살아 온 것 같다"고 고백했다.

다음 작업으로 종이접기가 주어졌다. '고인이 내게 건넬 것 같은 말'을 색종이에 적어 보고, 연꽃처럼 물 위에 띄웠다. '넌 존재만으로도 참 특별하고 소중해',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넌 무해한 사람이야', 'CUTE('귀여워'라고 쓰고 싶었으나 괜히 민망했다.)', '맑음, 순수'라고 썼다. 그리고 물과 돌이 담긴 그릇에 띄웠다.

작업 동안에는 국악 동요 '모두 다 꽃이야'가 흘러나왔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외모, 성적, 경제력 등과 상관없이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끼고 사랑해줬던 고인이 생각났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13일 진행된 세 번째 회기에서는 내면을 조금 더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인이 해 줄 것 같은 말을 아크릴판에 새기는 작업을 했다. '넌 빛나는 보석이야'라는 문구를 적었다.

이날 함께 들은 노래는 한국 가곡 '시간에 기대어'였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흥(興)과는 거리가 매우 먼 기자는 노래가 나오면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쭈뼛거렸다. 그래도 어색하게나마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김 대표는 기자에게 "예민하고 섬세하고 공감을 잘 하다 보니 노래 분위기에 영향을 잘 받는 편"이라며 "힘들 때는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기운을 얻는 게 도움 될 것"이라고 추천했다.

15년째 음악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은정 대표는 고려대구로병원을 비롯해 국립암센터, 가톨릭대 성모병원, 가천길병원 등에서 임상 및 연구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 김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내담자에 대해 "최근 마지막 여생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 '음악유산 남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말기암 환자 분이 생각난다"며 "아내, 자녀, 사위, 손자 모두가 함께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고 노래를 녹음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삶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냈다"고 떠올렸다.

음악과 심리치료의 만남도 흔치 않은데, 김 대표는 여기에 호스피스와 사별도 결합했다. 교통사고로 김 대표의 아버지가 갑자기 떠나 힘들었던 어린 시절, 음악이 큰 위로가 돼 줬기 때문이다. 이후 김 대표는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다른 이들과 나누게 됐다.

"사실 호스피스 환자와 가족, 사별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너무 크잖아요. 하지만 음악심리치료를 통해 그들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어요."
김은정 '카운셀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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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