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의 연기 노동

입력
2022.06.14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내가 번 돈으로 직접 산 거야."

배우 윤여정이 2013년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반지를 잃어버리고 속상해하며 했던 말이다. 지금이야 그의 솔직한 화법에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출연료를 두고 "내가 (일해서) 번 돈"이라고 표현하는 배우가 낯설었다. 그 한 문장에서 자신이 연기를 하는 직업인이라는, 내 힘으로 일해 벌어 먹고 산다는 자부심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연기는 노동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내 새끼들 먹여 살려야 된다'는 책임감이 연기를 계속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밝혔다. 연기자에게 필요한 자질로 암기력, 집중력, 관찰력에 이어 "임금 협상력"을 꼽으니 말 다했다(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 중). "드라마 '파친코' 제작비가 1,000억이라면서요?"라고 묻는 진행자에게 "내가 얼마 받았는지가 중요하지"라고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낀다. 돈이라는 주제가 문화·예술 종사자에게 유난히 금기처럼 여겨지는 장면을 목격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자신의 SNS에 "생계형 배우의 연기 노동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며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을 축하했다가 '논란'이 됐던 게 단적인 예다. 이 발언을 두고 '연기자가 노동자냐', '모든 것을 노동 프레임으로 생각한다', '돈 없어도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배우도 많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많은 사람이 연기를 노동이 아닌, 성역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면서 생계, 노동, 돈이라는 단어 자체에 불편해한다는 것도 의아했다. 물론 돈만 좇는 삶은 허망하겠으나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허위 의식이다. 카메라 앞에서 신들린 연기를 한다 해도 카메라 뒤에서는 의식주를 챙겨야 하는 생활인이다. 배우든 누구든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맡은 일에 대한 책임과 직업 윤리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한 거 아닌가.

방송, 영화 산업 종사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은 업계 안팎의 이런 '낭만적 위선'과 무관하지 않다. 촬영 현장의 대다수 스태프가 제작비와 일정이라는 우선 순위에 밀려 낮은 임금과 밤샘 노동에 시달린다. 개선을 요구하면 잘리기 일쑤다. 동료들을 대신해 임금 인상을 건의했다가 해고당한 뒤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CJB청주방송의 고 이재학 PD가 그랬다. 최근엔 KBS에서 방영 예정인 드라마 '미남당'의 스태프들이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했다가 부당해고를 당했다며 방송을 연기하라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비정규직이 태반인 인력 구조는 재계약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부당함에 침묵하는 악순환을 부른다.

K콘텐츠의 명성에 걸맞은 노동 친화적인 촬영 현장을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작품의 화려한 성공을 위해 달려가기 이전에 우리 모두 '밥' 먹고 살기 위해 일터에 나와 있다는 기본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이의 노동력이 투입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것이다.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배우 윤여정이 70세가 넘어서도 그 사실을 잊지 않듯이 말이다.

송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