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파티에 놀러가던 여중생 미선이와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사고 발생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마련하기로 했던 조치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사고 현장 주변에는 또다른 사고를 예고하는 것 같은 아찔한 흔적이 가득했다.
12일 오전 찾은 경기 포천시 영중면 성장로 일대는 20년 전 효순·미선이 사건이 발생했던 양주시 56번 지방도와 구조가 유사하다. 왕복 2차선 도로에 차로 폭도 좁고, 근처에 군 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 장갑차가 자주 다닌다. 2020년 8월 미군 장갑차와 충돌한 SUV 탑승자 4명이 숨졌던 포천시 관인면과도 매우 가깝다.
"초입 가드레일은 벌써 4번이나 교체했어요. 이쪽이 특히 잘 안 보이는지, 장갑차가 자주 부딪치더라고요."
철제 울타리를 바라보던 영중면 주민 A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드레일 곳곳엔 전차·장갑차와 같은 궤도차량이 좁은 도로를 지나가다 생긴 스크래치가 선명했다.
영중면사격장대책위원회 강태일 위원장과 함께 문제가 된 성장로(약 1.5㎞)를 직접 돌아본 결과, 거의 모든 구간에서 가드레일은 검은색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강 위원장은 "찌그러진 부분은 몇 번이나 교체했고, 긁힌 건 너무 많아 그대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근에 육군 5군단이 있어 영중면에선 장갑차 주행이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최근 장갑차 주행은 주민들의 근심거리로 떠올랐다. 지난해 포천시가 영중면 성장로 일대에 둘레길을 만든 게 발단이었다. 시는 둘레길 조성을 위해 왕복 2차선 도로 폭을 줄이고, 한편에 차도와 둘레길을 구분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했다.
문제는 해당 구간은 장갑차가 빈번하게 다니는 곳이란 점이다. 강 위원장은 "둘레길이 형편없이 조성된 건 둘째치고, 가뜩이나 좁은 도로 폭을 더 좁혀놨으니 장갑차가 다니는 데 무리가 있지 않겠냐"고 지적했다.
2002년 발생한 효순·미선이 사고는 차로 폭이 좁았던 게 주된 원인으로 꼽혔다. 사고 당시 도로 폭은 3.4m 정도였는데, 미군 장갑차 너비는 3.67m였다. 왕복 2차선 도로로 인도마저 없었기에 두 여중생은 피할 틈도 없이 변을 당했다.
영중면 주민들은 20년 전 발생한 효순·미선이 사고를 떠올리며 차량과 보행자 안전을 우려하고 있다. A씨는 "최근엔 장갑차가 기동할 때 반대편 차선을 아예 차단해버린다"며 "도로 폭이 좁아 마주 오는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주민 B씨도 "장갑차는커녕 일반 차량도 양쪽에서 오면 간신히 지나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 위원장은 "보행자를 위한 길을 만들었다지만, 보행자가 더 위험해진 꼴"이라며 "지역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고 말했다.
효순·미선이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2003년 한미 당국은 훈련안전조치 합의서를 체결해 선두와 후미에 호송차량 동반 및 궤도차량 이동 시 72시간 전 지역 주민에게 사전통보하도록 후속 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2020년 8월 포천시 관인면 영로대교에서 발생한 미군 장갑차와 SUV 충돌사고 전까지, 훈련일정과 차량이동계획을 한 차례도 알리지 않았다. 경기도가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군은 SUV 충돌사고 이후인 2020년 11월부터 지역 주민에게 부대이동 일시와 경로를 사전 공유했다. 17년 동안 합의안을 이행하지 않다가, 사고가 재발하자 부라부랴 후속 조치에 나선 것이다.
국방부는 SUV 충돌사고 후 분기별로 합의서 이행 여부를 점검하겠다고 밝혔지만, 말뿐이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주한미군 훈련을 우리 군에서 관리·통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합의서 이행 여부를 점검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행 실태를 정기 점검하도록 합의서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시민사회단체에선 효순·미선이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난 만큼 주한미군과 정부가 주민 안전을 위한 후속 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소속 김종귀 변호사는 "합의서를 만들 때 벌칙 조항을 넣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도록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