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계 다이아몬드' 경주 체리 80년 재배… 농촌 블루오션으로

입력
2022.06.1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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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우리 고장 특산물 : 경주 체리
1936년 일본인이 경주 건천에 심어
1944년 홍순원씨가 과수원 체계화
수분수와 궁합 맞아… 국내 40% 생산
보문단지 연계 관광체험농장 조성도
"수입산 공세 맞서 명품산업으로 육성"

체리는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아 과일계의 다이아몬드로 불린다. 관능적인 ‘체리레드’ 색은 눈길을 사로잡고, 새콤달콤한 맛에 끌려 자꾸 손이 갈 수밖에 없는 마성의 매력을 갖췄다. 국내에선 5월 말부터 6월까지 주로 맛볼 수 있어 요즘이 제철이다. 맛도 맛이지만,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등 항산화물질이 풍부해 섭취하면 체내 염증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통풍이나 관절염 환자에게 효과 좋은 영양 만점 과일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벚나무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이다. 벚나무 열매는 찔레 열매 크기 정도로, 주로 날짐승들 차지다. 체리는 예전엔 버찌나 양앵두로도 불리다가 지금은 체리로 통일됐다.

체리는 오랫동안 귀한 과일로 대접 받았다. 요즘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물론 동네 슈퍼에서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접할 수 있다. 1990년 수입을 시작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2012년부터 물량이 급증했다. 지난해 수입량은 1만7,000톤에 달했다. 이와 비교하면 국내산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이처럼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국산 체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곳이 있다. 최대 주산지 경북 경주다. 지난해 말 기준 120농가에서 70ha 면적에 체리를 재배하고 있다. 단연 전국 1위 규모다. 재배 면적은 전국(300㏊)의 23%, 생산량은 40%가량이다.

지난 3일 경북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의 체리농장을 찾았다. 송재도(72) 경주체리작목반장이 운영하는 곳이다. 송씨 자녀와 손자까지 6,7명이 모여 막바지인 조생종 체리를 수확하느라 분주했다. 올봄 냉해에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수확량이 평년의 절반도 안 된다지만, 농부에게 수확의 기쁨만큼 큰 낙은 없을 터였다.

송씨는 “올해는 국내산이 출하하는 시기에 미국산이 수입돼 타격이 크다”면서도 “요즘은 다른 데서도 많이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체리는 경주와 대구(동구)산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 농장은 우수농산물관리(GAP, good agricultural practices) 인증을 받아 경북능금농협 산지유통센터(APC)를 통해 대형마트 등으로 유통한다”며 “사과나 배에 비해 훨씬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목”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재배하기 만만한 과일이란 뜻은 아니다. 그는 “땅속 1m 깊이에 구멍이 숭숭 난 배수용 유공관을 매설해 놓았다”면서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농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주 체리는 한국 체리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1936년 일본인이 건천읍 화천리 1419번지 뒷산 8부 능선에 수십 그루를 심은 게 시초다. 1944년 홍순원씨는 7년생 체리나무를 과수원 규모로 체계화했다. 한국인이 체리를 상업적으로 재배한 첫 사례로 꼽힌다. 1908년 일본에서 시험 재배를 위해 100그루 정도를 반입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농사로서 체리 재배는 이때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국산 체리는 재배 지역이 유독 경주 건천읍과 대구 동구 일대에 몰려 있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두 지역이 전국 재배 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송씨는 “이상하게도 여기선 잘 되다가도 다른 곳에 가면 4,5년 뒤에 죽거나 열매는 달리지 않고 나무만 무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10여 년 전 신품종이 대거 도입되면서 비로소 전국적으로 체리 재배가 붐을 이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25년간 체리 업무만 해왔다는 경주농업기술센터 김정필(52·농학박사) 경제작물팀장이 거들었다. 김 팀장은 “체리는 사과나 배와 같은 ‘주류’ 과일이 아니어서 재배 기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체리는 한 품종만 심으면 열매가 달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20~30%의 수분수를 심어야 하고 수분수도 서로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면서 "이 같은 점을 모른 채 무작정 나무만 가져다 심다 보니 실패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체리 농사는 경주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들어 경북도농업기술원 등이 품종보호권(과수는 25년) 만료가 임박한 20여 종을 도입해 시험 재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국 농가에 보급을 넓히고 이후에도 속속 신품종을 도입하면서 현재 국내 재배 품종은 약 50종에 이른다.

체리는 사과에 비해 노력 대비 소득이 좋은 작물로 알려져 있다. 방제 횟수는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수확 기간은 5월 말부터 한 달 정도로 짧다. 반면 조수입(필요 경비를 빼지 않은 총수입)은 사과의 1.4배나 된다. 수입 물량이 많지만, 항공기로 수송해야 하는 특성상 가격이 비싸 국산 체리는 여전히 경쟁력을 갖췄다.

경주시는 이에 체리 산업 경쟁력 강화에 발벗고 나섰다. 관내 모든 농가에 GAP인증을 지원하고, 내년부터 전량 친환경 매장에 출하할 계획이다. 농민들은 수확한 체리 그대로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APC가 선별 포장하고 매장에서 판매해 비용을 공제한 뒤 정산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아울러 품질 고급화를 위한 ‘경주형 비가림’ 시설을 개발해 보급키로 했다. 한창 익을 시기에 많은 비로 열매가 갈라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선 비가림 시설이 필수다. 다만 많은 비용이 들어 농민들은 그동안 시설 설치를 주저해왔다.

경주시는 이와 함께 체리 와인을 제조하고 체험농장을 활성화하는 등 다양한 육성 방안을 내놓았다. 김 팀장은 “국내 소비가 크게 늘고 있어 체리 시장은 블루오션”이라며 “80년 재배 역사를 바탕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보문관광단지와 연계한 관광상품을 개발해 체리를 경주의 명품으로 육성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주= 정광진 기자
경주= 김성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