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대체 티니안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한 거야?” 공항에 먼저 와 있던 J가 이민가방처럼 큰 캐리어를 끌고 오는 나를 보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5박 6일인데...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아?” 휴양지 느낌 물씬한 꽃무늬 원피스에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쓴 내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대휴에 연차에 주말까지 붙여 마련한 귀한 휴가였다. 그런데 뭐지, 시작부터 이 불길한 예감은?
서른일곱 여름, 사실 그때 나는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조금 복잡한 상태였다. 잡지 기자 일은 나쁘지 않았지만, 10년차를 넘기면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흔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달라야한다는 어떤 조급함이 이따금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속한 회사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었다. “사이판 근처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섬이 하나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갈래?”라는 친구 J의 말에 별 고민 없이 응한 건 그래서였다. 조용한 섬에서 한 며칠 지내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나와 달리 짐이라곤 조그만 기내용 캐리어 하나가 전부인 J가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가보면 알 거야. 거긴 정말 아무 것도 없거든.”
“아무 것도 없다”는 그녀의 말을 실감하기까지는 다섯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인천에서 사이판까지 네 시간, 다시 경비행기로 10분 걸려 도착한 티니안은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산했다. 3,000명 인구 대부분이 모여 산다는 ‘산호세 마을’ 근처에 숙소를 잡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주변에 상점은커녕 번듯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았다. 티니안 최고의 해변이라는 말에 한껏 기대했던 숙소 앞 ‘타가 비치’도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텅 빈 백사장 너머 원주민 꼬마 서넛이 차례로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J가 ‘봤지?’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세 번씩이나 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안내원처럼 무료하기 짝이 없는 섬이었다.
우리는 렌터카를 타고 남북으로 뻗은 직선 도로를 따라 달렸다. 마을을 벗어나자 안 그래도 볼 것 없는 풍경이 더 단조로워졌다. 밀림에 가까운 야생 숲과 속이 다 비치는 투명한 해변이 해안선을 따라 하염없이 이어졌다. 아름답긴 했지만, 가까운 괌이나 사이판에 비해 특별히 더 대단한 풍경은 아니었다. 심지어 섬을 남북으로 왕복하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티니안은 사이판에 놀러 왔다가 반나절 짬을 내어 들르는 그런 섬이었던 것이다. 제주도로 치면 우도쯤 되는 곳이랄까. 서울에서 챙겨온 화려한 옷들을 꺼내 입을 일은 오늘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드라이브를 마친 우리는 근처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스노쿨링을 하고, 60분짜리 아쉬탕가 요가를 하고, 아일랜드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의 600쪽 넘는 단편집을 3분의 1 넘게 읽었지만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었다. “자주 가는 맛집 같은 거 없어?” 내가 칭얼대듯 말하자 J는 식당에 가려면 다시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야 한다며, 출발할 때 숙소 앞 매점에서 산 피자 박스를 무심히 가리켰다. 다 식어빠진 피자, 마감 때 질리도록 먹은 그 처량맞은 음식을 여기 와서까지 먹어야 하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정작 내 앞을 가린 건 눈물이 아닌 빗방울이었다. 열대성 폭우 ‘스콜’이었다. 허겁지겁 트렁크에서 우비를 꺼내는 나를 보며(그렇다, 우비까지 챙겨왔다) J는 도시 촌년 보듯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에는 그녀의 경고를 실감하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비 따위로 피할 수 있는 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섬 북쪽 끝에 있는 노스필드 비행장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만든 비행장을 미군이 빼앗아 확장한 것으로, 태평양전쟁 말미에 미군이 원자폭탄 발진 기지로 삼으면서 일본 본토 공략의 교두보로 사용된 곳이었다. 차가 목적지에 가까워오자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직선으로 쭉 뻗은 네 개의 활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니안의 주요 관광 포인트 중 하나’라는 팸플릿의 설명과 달리, 비행장에는 비행기는커녕 비행기 모형 비슷한 것도 없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고밀도의 콘크리트 대지가 햇볕 아래 지글지글 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서 더 극적으로 느껴지는 장소였다.
비행장 북쪽에 관처럼 각진 작고 초라한 유리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보관했던 장소였다. 그렇잖아도 어제 산호세 교회 앞에서 포탄 자국이 선명하게 박힌 종탑을 보고 내심 놀란 터였다.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섬 곳곳에는 치열한 교전의 흔적이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휴양지답지 않은 황량한 느낌은 아마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하는 듯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어제와 다른 해변에서 어제와 다름없는 오후가 이어졌다. 해변이 너무 고요해서였을까?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리고 있자니 아까 본 비행장의 존재가 살짝 버성겼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구글링부터 하는 평소 습관대로 휴대폰을 켜고 노스필드 비행장을 검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 자료 몇 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당시 티니안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지휘 아래 지옥 같은 노동을 견뎌야했다. 그중 하나가 비행장 건설이었다. 변변한 도구도 없던 그들은 산호가 섞인 모래를 빻아 땅을 다졌다. 먹을 것은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얻어먹기 어려워 어떤 이는 자신의 오줌을 몰래 보관해두었다가 마시기도 했다. 한번은 그 오줌을 누군가 훔쳐 마시는 바람에 서로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그러나 당시에 대한 온전한 기록은 현재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수백, 수천 명의 한국인이 미국과 일본의 전쟁 사이에서 처참히 이용 당했지만 이제는 그 사실조차 없던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조금 전 휴대폰으로 찍었던 비행장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곳에서 출발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차례로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당시 두 도시의 군수공장 근처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다수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막 접한 후였기 때문이다. 전쟁 노동자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만든 활주로가 결과적으로 같은 처지의 한국인들을 죽이는데 사용된 것이다.
이후 J와 나는 오전에 관광 포인트를 돌아보고 오후에 해변으로 향하는 루틴을 반복했다. ‘자살 절벽’에 간 날은 근처 ‘타촉냐 비치’에서, ‘일본 해군사령부 터’에 간 날은 근처 ‘롱 비치’에서 시간을 보내는 식이었다. 해변에서 산책을 하고 수영을 하고 책을 읽고 요가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켰다. 무언가를 입력할 때마다 충격적인 사실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세가 기울 무렵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린 일본군과 민간인 중에는 조선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두려움에 곧장 바다로 뛰어내렸을 거라는 세간의 짐작과 달리 대다수는 바위 위로 몸을 던졌다는 것, 개중에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다 총살 당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드물게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원주민의 약 20%는 당시 학살과 생매장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선인들의 후예이며 티니안에서 흔한 성인 King(킹), Shing(싱), Kiosshin(키오씬)은 우리나라의 김 씨, 신 씨, 강 씨에 해당한다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얼굴은 우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
참혹한 전쟁의 상흔과 평화로운 해변 풍경이 반복해서 갈마드는 동안 내 안에 무언가가 서서히 변해갔다. 섬과 내가 부딪치고 다투다 마침내 하나가 되는 그 기묘한 동기화의 기분은 요가 동작 중에 은근히 찾아오기도 했고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을 읽다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주 확실하게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 사이로 크고 작은 물음표들이 떠다녔다.
섬을 떠나기 전 우리는 첫날 들렀던 ‘블로우 홀’을 다시 찾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산호초 사이로 난 바위구멍으로 물줄기를 토해내는 아담한 크기의 천연 분수였다. J는 티니안에서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가 왜 이 섬을 자주 찾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박력 있게 솟구치는 그 작은 물보라를 보며 나는 내 안에 어떤 공동,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할 커다란 공동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돌아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여행기 형식으로 잡지에 실었다. 예상대로 잡지는 머지않아 폐간했고, 시간이 많아진 나는 그 기록을 토대로 허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박물관 한편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안내인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유물처럼 잠들어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일제히 허공중에 날아올랐다. 나는 그 파편들을 멍 때리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티니안의 해변이 내게 가르쳐준 대로,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심할 때까지 가능한 한 오래. 내 글은 보잘 것 없었지만 티니안은 힘이 셌다. 얼마 후 나는 이 글로 소설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