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맞서 태평양 10개 섬나라들과의 안보·경제 협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다자 협정을 체결하려던 중국의 시도가 일단 불발됐다. 일부 국가가 협정으로 미중 갈등이 격화해 남태평양 지역 안보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 포괄 협정에는 실패했지만, 중국은 개별 국가와는 계속해서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30일(현지시간) AP통신 등 주요 외신은 중국이 이날 열린 제2차 중국-남태평양 섬나라 10개국 외교장관 회의에서 안보와 경제협력을 아우르는 협정인 '포괄적 개발 비전' 합의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6일부터 남태평양 8개국 순방에 나선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이날 피지에서 솔로몬제도, 키리바시, 사모아, 피지, 통가, 바누아투, 파푸아뉴기니, 니우에, 쿡제도, 미크로네시아 등 10개국 외교장관과 회의했다.
협정 초안에는 중국이 태평양 섬나라들과 안보 협력 관계를 맺고 중국 공안을 파견해 해당 국가의 경찰을 훈련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중국이 남태평양 10개국에 수백만 달러 규모를 지원하고 이들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외 법 집행 협력과 어업 협력, 사이버 보안 문제 등 네트워크 협력 강화, 정치적 관계 확대,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권 확대 등의 내용도 있었다.
이같이 방대한 지원·협력 강화는 남태평양 섬나라들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맞서는 전략적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역내 13개국이 참여하는 경제 협의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발족하는 등 중국 견제에 방점이 찍힌 인도·태평양 전략을 펼쳐왔다. 이에 중국이 이번 협정을 통해 미국의 동맹 호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태평양 섬나라들을 공략해 '군사기지화'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중국은 이날 결국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미국과 호주 등이 중국의 행보를 견제하고 몇몇 당사국이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따른 지역 내 긴장 고조를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 부장의 남태평양 순방 소식이 전해지자 호주는 피지에 외무장관을 급파했고, 미국도 피지의 IPEF 가입 사실을 전하며 중국을 견제했다.
몇 개 국가가 이견을 보였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신은 미크로네시아 측이 이견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데이비드 파누엘로 미크로네시아 대통령은 최근 다른 태평양 섬나라 지도자들에게 "(중국의 구상이) 불필요하게 지정학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지역 안정을 위협할 것"이라며 협정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파누엘로 대통령은 이 협정이 "잘하면 신냉전 시대, 최악의 경우 세계 대전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날 포괄적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중국은 앞으로도 개별 국가를 상대로 한 양자 관계 강화는 계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미 솔로몬 제도·키리바시·사모아 등과 방역 협력, 기후변화 협력, 인프라 협력 등에 합의한 상태다. 왕 부장은 이날 회의를 마치고 "우리는 앞으로도 (이 국가들과) 더 많은 합의에 이루기 위해 깊이 있는 토론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