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상가 이탁오(卓吾, 본명 이지·李贄)는 '태워야 할 책'이란 뜻의 저서인 '분서(焚書)'에서 '친구'를 여덟 종류로 구분했다.
먼저, 길을 오가며 만난 시정지교(市井之敎), 함께 어울려 노는 오유지교(遨遊之敎), 밥과 술을 같이 즐기는 주식지교(酒食之敎),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좌담지교(座談之敎), 글을 읽고 논하는 문묵지교(文墨之敎), 내 몸처럼 가깝고 친한 골육지교(骨肉之敎),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심담지교(心膽之敎), 죽음까지 함께할 만한 생사지교(生死之敎) 등이다.
기존 유교 사회에서의 교우(交友) 개념은 친구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친구의 험담과 모략에도 이해하는 성인과 군자의 모습이다.
사기(史記)에도 기록된 두터운 우정의 대명사인 '관포지교(管鮑之交)'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밖에 교칠지교(膠漆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백아절현(伯牙絶絃), 수어지교(水魚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죽마고우(竹馬故友) 등도 모두 바람직한 친구 관계를 나타내는 고사들이다.
이런 전통적인 분위기에서도 그는 인간의 본성과 실제적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직시하고 분석했다. 역시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탁오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공자와 주자를 비판하고 신분과 남녀평등을 외치며 기존 가치에 반기를 들었다. 또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 중심의 혁신 사상을 주장했다. 결국 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이단으로 몰려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체포돼 감옥에서 자결했다.
하지만 현대 들어 이탁오는 봉건 질서를 비판한 해방 유학자이자 시대의 선각자로 평가받으며 중국 역사상 83명의 영걸 중 하나로 꼽힌다. 그에 대한 평가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묘비에 '일대종사 이탁오선생지묘(一代宗師 李卓吾先生之墓)'라는 글귀에서 잘 알 수 있다. 반봉건 투쟁의 선구적인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최근까지도 이탁오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탁오는 조선의 천재이자 역시 혁신가였던 허균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봉건주의 사회에서도 사람의 본성을 꿰뚫은 이탁오가 현대 자본주의를 겪었다면 기존의 붕우(朋友) 관계에서 이익이 있을 때만 만나는 '이해지교(利害之敎)'와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이용하는 '필요지교(必要之敎)'를 추가했을 것이다.
공자는 "유익한 세 친구(益者三友)와 해로운 세 친구(損者三友)가 있다"고 말했다.
정직한 사람(友直), 헤아리고 살피는 사람(友諒), 견문이 많은 사람(友多聞)은 유익(益矣)하고, 반면 아첨하는 사람(友便辟), 줏대가 없는 사람(友善柔), 겉으로 친한 척하고 성의가 없는 사람(友便佞)은 손해(損矣)된다는 것이다.
명리학(命理學)에서 친구는 비겁(比劫. 比肩·劫財)이라 한다. 비견(比肩)은 사주의 주체인 일간(日干, 생일 위 글자)과 음양(陰陽)이 같은 오행(五行, 木火土金水)이고, 겁재(劫財)는 음양이 다른 오행이다.
같은 친구이지만 비견은 나와 성향이 같고 지지해 주는 사이다. 반대로 겁재는 같은 사항을 두고 경쟁하면서 심지어 나에게 해가 되는 관계다. 역시 내 편이 있으면 반대도 있다는 '음양의 법칙'이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오래된 친구들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이탁오는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