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과 저승사자

입력
2022.05.1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공금이나 회사 자금, 남의 돈을 관리하는 이가 그 재물을 불법으로 가로채 제 돈인 양 쓰는 횡령 사고는 늘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유독 이런 일이 잦다. 지난 1월 오스템임플란트의 40대 자금관리팀장이 회사 자본금보다도 큰 2,215억 원의 거액을 빼돌린 사건은 충격을 줬다. 지난달엔 우리은행 직원이 회삿돈 614억 원을 횡령한 사실도 드러났다. 며칠 전에도 아모레퍼시픽 회사 직원 3명이 35억 원을 횡령한 것으로 밝혀졌다. 강동구청(115억 원) 계양전기(246억 원) 클리오(22억 원) 신한은행(2억 원) 등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 최근 횡령 사건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이들이 빼돌린 자금을 갖고 도망을 치거나 잠적한 게 아니라 주식이나 선물옵션, 가상화폐 등에 투자해 더 크게 불리려 했다는 점이다. 오스템임플란트 직원은 횡령한 돈으로 무려 40여 개 주식 종목을 1조2,800억 원어치나 매수했다. 차액결제거래를 통해 보유 자금보다 더 큰 돈을 운용했다. 우리은행 직원도 빼돌린 돈으로 대표적인 파생 상품인 선물과 옵션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모레퍼시픽 직원들도 주식과 가상화폐 등에 투자하거나 사내 불법 도박을 일삼았다. 모두 황금만능주의와 한탕주의에 빠진 셈이다.

□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풀린 막대한 유동성과 몇 년간 자본 금융 시장의 활황은 적잖은 이들에게 리스크 관리보다는 대박의 환상을 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식과 이성이 작용하긴 힘들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직업관이나 윤리의식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마련이다. 이를 감시하는 내부 통제 시스템은 필수다. 집안 단속과 철저한 회계 시스템을 통해 투명하고 정확한 재무 정보를 제공해야 할 상장사에서 횡령 사건이 잇따른 건 유감이다. 더구나 고객이 믿고 맡긴 돈을 관리하는 은행에서 횡령 사고가 난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를 적발하지 못한 허술한 시스템과 관리자, 감독 기관, 회계법인 등도 모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행히 자본시장의 불공정거래를 집중 수사해 ‘여의도 저승사자’라 불리던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단'이 2년여 만에 부활했다. 할 일이 많다.

박일근 신문국장 ikpar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