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암호화폐 시장의 총체적 폭락의 중심에는 '스테이블코인(가치가 안정된 암호화폐)' 테라USD(UST)가 있다. 영향력이 높았던 UST와 '자매 코인'인 루나(LUNA)가 동시에 폭락하는 '죽음의 나선(death spiral)'에 빠지면서, 암호화폐 시장 전체의 투자 심리가 동시에 얼어붙은 것이다.
문제의 UST와 루나를 발행한 블록체인 기업 테라폼랩스를 설립한 인물은 한국인 권도형(31) 대표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에 모인 암호화폐 공동체의 스타 중 하나였다. 하지만 UST와 루나가 위기에 몰린 현 상황에서는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 불신을 증폭하고 있다.
13일 코인마켓캡 등 암호화폐 시장 전문 매체에 따르면 테라폼랩스가 발행한 UST는 1UST당 1달러선에서 한때 0.2달러선까지 내려갔다. 한때 1루나당 119달러(15만 원)를 넘보며 전체 암호화폐 시가총액 6위까지 올랐던 루나는 이날도 99% 폭락해 1센트(100분의 1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한때 10만 원을 넘던 화폐 가치가 1원대로, 동전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국내외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개인 투자자들이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다.
UST는 물론 루나가 거의 가치가 없는 수준까지 폭락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테라의 암호화폐 발행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UST는 가치가 안정된 스테이블코인을 표방한다. 즉, 1UST를 1미국 달러로 교환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의미다. 마치 홍콩 달러가 '1미국 달러=7.8±0.5홍콩 달러'를 유지하는 정책(페그)과 비슷하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UST와 달러의 교환을 원할 때 달러를 꺼내 줄 수 있도록 발행 담보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테라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알고리즘을 통해 달러 가치에 맞춰서 UST를 발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라 부른다.
UST의 가치 유지를 위해 테라는 자매 코인인 루나를 내놨다. 루나 자체는 스테이블코인이 아닌, 일반 암호화폐다. 하지만 UST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뒷받침 용도로 쓰인다. 테라는 1UST가 1달러 밑으로 내려가면 루나로 UST를 구매하는 동시에 루나의 공급량을 늘리고, 1달러 위로 올라가면 UST로 루나를 구매하는 동시에 루나의 공급량을 줄여 1달러 가치 유지를 유도했다. 아울러 테라는 UST를 예치하면 연 20%에 달하는 수익을 테라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암호화폐에 우호적인 이들조차 테라의 아이디어에는 물음표를 달았다. '고정된 가치'를 표방하면서 이를 담보할 최소한의 현실적 근거조차 없다는 우려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페그로 유명한 홍콩 페그제조차 '핫머니(단기로 이동하는 자본)'의 페그 붕괴에 베팅한 공격을 늘상 받고 있다. 하지만 홍콩 금융당국의 외환보유고와 홍콩에 터 잡은 수많은 국제 금융 기업, 그리고 배후 시장인 중국을 향한 투자 수요로 버티고 있다.
이런 비판에 응답하는 대신 권씨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국 경제학자 프랜시스 코폴라의 "금융 인센티브에 의존하는 자기 조정은 혼란에 빠진 투자자들이 대규모 탈출에 나설 경우에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에 권씨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트위터에서 가난한 이들과 토론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에게 적선할 잔돈이 없다."
권씨의 저돌적인 언행은 일론 머스크 같은 'SNS 스타'가 그렇듯 지지자들의 환호를 끌어모았지만, 그만큼 많은 적대 세력도 만들었다. 테라가 방어 노력에도 집중 공격을 당하고, 루나가 일주일 새 90% 이상 폭락한 현재 시점에서 이 대화는 그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용도로 '박제'돼 트위터에서 다시 돌고 있다.
암호화폐 공동체 내부에서조차 권씨의 "거만한" 언행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루나 폭락 직전인 지난 4일 방송 플랫폼 '트위치'의 체스 스트리머 알렉산드라 보테스의 방송에 출연한 권씨는 "현재 존재하는 코인 스타트업의 95%는 무너질 것"이라면서 "그런 걸 보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테라에 매료된 투자자들은 권씨를 향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면서도 "우리를 구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블랙록과 시타델 등 대형 금융투자그룹을 거명하며 "테라를 향한 공격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현재 상황을 2021년 초 발생한 개인 투자자들과 거대 금융투자 그룹의 공매도 전쟁, 즉 '게임스톱 사태'와 같은 성격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들 그룹은 모두 UST를 거래한 사실 자체가 없다고 부정했다.
현재 UST와 루나를 향한 쇼트(가격 하락 베팅)를 적극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암호화폐 시장에 적극 참여하는 '안티 테라' 투자자들이다. '테라 회의론'의 대표 계정으로 유명한 '갈루아 캐피털'은 11일 승리를 자축하면서도 스스로를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나선 로마 집정관 카토에 비유하면서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돼야 한다"고 외쳤다.
테라가 방어수단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올해 들어 '루나 파운데이션 가드(Luna Foundation Guard)'라는 그룹을 출범해 테라 생태계에 다수의 투자자를 끌어들이면서 지급준비금을 구성했다. 이들은 '테더'처럼 미국 달러를 준비금으로 내세우는 다른 스테이블코인과 달리 암호화폐의 맹주인 비트코인을 매입해 준비통화로 내세웠다. 비트코인은 암호화폐 세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치 안정을 대표하지만 현실 금융시장에선 여전히 위험자산으로 취급되며 주식시장과 동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권씨는 루나 발행량을 늘리는 제안에 동의하는 한편 대규모 자본 유치를 위해 LFG에 참여한 다른 투자자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경제 전문 매체 블룸버그의 취재에 의하면 이들 중 다수는 논평을 거부하거나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전해 왔다. 더구나 UST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LFG에서 준비한 비트코인이 대규모 매물로 나올 것이란 예상 때문에 비트코인의 가격도 덩달아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테라 왕국'의 붕괴 신호는 암호화폐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의 폭로 보도로도 나타난다. 이 매체는 UST의 발행에 앞서 2020년 말 발행됐으나, 가치 유지에 실패한 스테이블코인 베이시스캐시(BAC)의 익명 발행인 '릭 산체스'의 정체가 권씨라고 보도했다. '릭 산체스'는 미국 애니메이션 '릭 앤드 모티'의 주인공 이름이다.
코인데스크에 증언한 테라폼랩스의 전 직원들은 "권 대표도 BAC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애초에 테스트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코인데스크는 "권씨 자신이 테라코인을 띄우기 위해 베이시스캐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코인데스크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익명성을 존중해 발행인의 신원은 보통 공개하지 않아 왔지만, 테라의 '죽음의 나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려해 이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샘 케슬러 기자는 "전직 직원들이 이런 사실을 증언한 것은 테라의 추락과 함께 권씨가 예전처럼 강력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코인데스크는 더 나아가 권씨를 테라노스 사기 사건을 일으킨 사업가 엘리자베스 홈즈에 빗대 "암호화폐계의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별칭을 붙이는 칼럼을 공개하기도 했다. 한때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에 비견되던 젊은 기업가는 이제 온갖 의심과 분노, 그리고 '손절매'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미국 정부에서도 '테라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11일 상원 청문회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안정성에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서 규제 도입 필요성을 시사했다. 게리 겐슬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도 같은 날 블룸버그를 통해 가상화폐 거래소 규제 필요성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