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쇼에 그쳤다 해도... 이준석-전장연 토론이 남긴 것

입력
2022.05.14 04:30
12면
<70>  어그로라도 끌어야 하는 소수자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4월 1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간의 '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싼 토론이 있었다. 나는 해당 토론의 생중계를 앞두고 장애인권 운동가들의 걱정된다는 반응과 "우리가 잃을 게 뭐가 있겠냐"며 동료들을 다독이던 박경석 대표의 인터뷰를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동시에 마주했다.

박 대표는 2001년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시작하면서 "욕 한 트럭을 먹어도 상관없으니 장애인 인권 문제가 '100분 토론'에 나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단 한 번이라도 공중파에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방식으로 나와 내 공동체가 진지하게 다뤄지길 바라는 그 마음이 뭔지 나는 안다. 비록 그 자리가 공격적인 '어그로(공개적 시비)'로 점철될 것이 뻔할지라도 말이다.

'어그로'에 기꺼이 맞서는 이유


장애·환경·퀴어·노동 운동가이자 작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장애인 재현의 다양성 부족을 지적하며 레즈비언 예술가 수전 스튜어트의 말을 빌린다. "가뭄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마실 물이 깨끗한지를 덜 따지게 되곤 한다. 우리 중 일부는 너무나도 오래 결을 가로질러 읽어 오던 탓에, 눈에 가시가 박혔다."

'결을 가로질러 읽기'란 페미니즘·퀴어 비평의 전략 중 하나로, 뻔한 이성애자 남자들의 욕망을 위해 생산된 글과 이미지 속에서 '우리의 것'을 발굴하려는 저항적·대안적 읽기의 방식을 뜻한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마련된 재현물이 매우 희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가시가 박히는' 고통이란, 여성과 퀴어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넘쳐나는 '지뢰밭'과도 같은 재현물들 사이에서 '우리의 것'을 훔쳐오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부수적인 고통이 된다.

한 줌의 가시성(visibility)을 위해서 '눈에 가시가 박히기'를 택하는 이런 전략은 분명 현실의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절박한 사람들의 '마실 물'을 위한 응급 처치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박경석 대표가 '100분 토론'을 언급한 것은 토론 내용상의 '질(quality)'이나 현실 정책의 반영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소수자의 삶이, 개인적인 비극 또는 극복의 서사의 일부로 재현되기는 쉽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공공의 문제'로 다뤄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자는 자극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후자는 '욕을 한 트럭 먹을' 가능성을 포함해 당사자 공동체 내·외부의 활력 있는 '노이즈(잡음)'를 생산한다. 이처럼 소수자 재현과 권리가 상보적인 관계임을 인정한다면, '100분 토론'이 됐든 '썰전라이브'가 됐든 공적인 형식으로 장애 당사자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그 자체만으로 왜 귀한지 알 것이다. 이준석 대표로부터, 그리고 아직 너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가시'가 박히더라도 말이다.


그럴싸한 언술 속 철저한 타자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보는 내내 나는 분노에 떨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명과 비문명'부터 시작해 '혐오 표현'이 뭔지를 장애 인권 운동가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야 말겠다는 그의 뻔뻔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웃음기가 싹 가셨다. 더욱이 이준석 대표가 그토록 집착하는 '팩트 체크(사실 확인)'는 겉으로 보이는 만큼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는 혐오 표현 연구자인 홍성수 교수의 말처럼 "혐오 선동에 가장 능수능란한 정치인"으로서의 퍼포먼스에 필요한 장치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가 아무리 '현실 정치'의 전문가처럼 박경석 대표와 장애 인권 운동가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내파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방송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혐오 감정'을 부추기는 '쇼(show)'를 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그는 한편으로는 '불법'과 '비문명'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들을 남발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과 '이익 집단으로서의 장애인 단체'의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시킨다. 마치 출근길에 '피해'를 보는 시민은 결코 장애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반복적인 언술 속에서 장애인은 타자화된다. 여성학자이자 장애학자인 수전 웬델은 '거부당한 몸'에서 타자화의 과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경험의 대상"으로 묶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장애인들은 '출근길 시위'를 통해 '우리'에게 불편을 '주는 대상'이 된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공포감과 거부감을 그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는 건 좋다. 그런데 그 예산은 결국 '시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토론창의 '상식적인' 댓글이 좋은 예시가 된다. 문제는 이준석 대표도 잘 아는 '혐오 표현'의 정의나 수위가 아니다. 미끈한 말들로 차별받는 특정한 집단을 '우리' 바깥으로 내모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그의 '프레임(틀짓기)'이 진짜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눈앞의 박경석 대표를 타자화한다. 그는 박경석 대표가 말하는 동안 여유롭게 등받이에 기대앉아 미소를 띠고, '자'와 같은 추임새로 언제든 상대의 말을 자르고 주도권을 가져간다. 심지어 그는 토론 도중에 '농담'을 한다. 놀랍게도 그의 농담은 적어도 진행자에게는 통했고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는다.

퀴어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나는 나를 앞에 두고 그런 식으로 웃을 수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 얼마나 내게 적대적인지 잘 안다. 이런 웃음에는 공범 의식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준석 대표의 발화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표현들도 '장애 인권 단체'와 '시민'들을 '갈라치는'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준석 대표의 목적은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박경석 대표로부터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상대가 누구든 찍어 누르는 그의 '능력'에 동일시할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타자화하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상성에 함께 저항하기

토론이 끝나고 나는 세상 모든 약자들의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서로 닮았는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비극적이지만 분명 정치화될 필요가 있는 '문제적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토론은 '혐오 감정'을 유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장애 인권 운동이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의 슬픔과 분노를 생산하는 현장이기도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나는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역사도 맥락도 몰랐던 주제에 말이다. 다행히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장애학은 언젠가의 '동지'들이 접속할 만한 교차점들을 풍요롭게 마련해두고 있었다. 서로 긴밀히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이 이론들은 세상의 '정상성' 기준에서 탈락한 존재들이 살아남는 법은 물론이고, 결국 모두를 괴롭게 할 뿐인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법까지 공유한다.


요컨대 '크립(crip·한국어로는 주로 '불구'로 번역된다) 이론'의 창시자 격인 로버트 맥루어의 '강제적 비장애 신체성'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를 참조하는 이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장애 신체성'의 이상적 규격과 이미지를 재생산함으로써 '정상성'이라는 허구적 신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그 기원이 모호한 채로 자연화된 '비장애 신체성'은, 이성애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라는 체계와 질서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억압의 한 축이다. 우리의 적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장애인과 페미니스트와 퀴어가 왜 함께 '정상성'이라는 공통의 적을 위해 '동지'로서 뭉쳐야만 하는지, 그 이유가 더욱 명백해진다. 공통의 슬픔과 분노를 연료로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한다.



이연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