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의 배신

입력
2022.05.12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경유 값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휘발유보다도 비싸졌다. 주로 서민들이 사용하는 경유는 휘발유 가격보다 낮은 게 정상이다. 그러나 12일 오후 전국 경유 평균 판매 가격은 리터당 1,952원까지 상승, 휘발유 가격(1,948원)을 추월했다. 처음은 아니다. 2008년 5월에도 역전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유 역대 최고가(1,947원, 2008년 7월16일)까지 깼다는 점에서 부담이 더 크다. 소형 화물차를 운영하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기름값을 아끼려고 디젤 승용차를 택한 알뜰 운전자는 할 말을 잃었다. 주유소 가는 게 겁난다.

□ 1년 전만 해도 1,300원대였던 경유가 2,000원에 육박하게 된 건 세계 3대 산유국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휘발유 가격은 연초 대비 50%, 경유는 75%나 올랐다. 더구나 유럽은 전체 경유 수입에서 러시아산 의존도가 절반도 넘는다. 미국은 유가 안정을 위해 석유생산수출카르텔금지법(NOPEC)까지 추진하며 사우디와 이란, 베네수엘라 등 다른 산유국의 증산을 압박하고 나섰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중국의 봉쇄가 풀리고 미국에서 여름 휴가까지 시작되면 유가는 더 뛸 공산이 크다.

□ 에너지 업계에선 ‘화석연료의 저주’ ‘탄소중립의 역설’이라고 얘기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과 탄소중립이 글로벌 화두가 되면서 석유 메이저의 투자가 급감하고 노후 설비 폐쇄가 빨라진 게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석유 제품 가격이 치솟으며 석유보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석탄 소비도 늘고 있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행보가 오히려 기후 변화를 앞당길 판이다.

□ 정부가 유류세를 내리면서 정가가 아닌 정률로 인하한 것도 역전 현상의 한 요인이다. 휘발유에는 유류세가 820원, 경유는 573원이 붙는데 이를 일률적으로 30% 인하하며 휘발유는 247원, 경유는 174원이 떨어지는 효과가 생겼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휘발유 소비자가 더 큰 혜택을 본 셈이다. 이는 결국 에너지 소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률적 유류세 인하보다 소상공인과 서민, 저소득층과 취약층을 위한 경유 쿠폰이나 바우처 지급, 유가환급금 등 맞춤 지원책을 검토해야 할 때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