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저녁 서울 강동구의 강동성심병원 성형외과. 간호사도, 다른 동료 의사도 모두 퇴근하고 어두운 건물에서 김결희 교수 진료실만 불을 밝히고 있다. 해가 기울어 저물 때까지 환자와 상담하던 김 교수는 끝나자마자 연락을 받고 입원실로 부리나케 향했다. "죄송해요. 환자 상태가 안 좋아져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입원실로 사라진 김 교수의 뒤로 보이는 책상에는 그의 분주함을 보여주듯 갖가지 자료가 어질러져 있다.
"제가 7월부터 3개월 동안 벨기에로 연수를 가는데 떠나기 직전까지 매주 수술이 있어요. 돌아오자마자 11월까지 또 예약이 꽉 차 있고요."
기자에게 보여준 그의 달력에는 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다. 김 교수는 최근 몇 달 사이 부쩍 바빠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병원장님이 이렇게 바쁜 때 굳이 연수를 가야겠냐고 말리더라"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대학병원 성형외과 의사가 이토록 바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엘지비티큐플러스(LGBTQ+) 센터'가 있다. LGBTQ+란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퀴어 등 다양한 젠더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고려대 안암병원, 순천향대 서울병원을 포함해 국내에서는 몇 안 되는 대학병원에 성소수자 전문 의료 시설이 있다. 2020년 하반기, 처음 시설을 세울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환자들이 찾지 않았다. 그는 센터가 막 문을 열었을 때를 떠올리며 "성확정(성전환) 수술에 대한 큰 포부를 가지고 이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수술 케이스가 6개월 동안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가슴 수술 전문인 김 교수가 강동성심병원에 처음 왔을 때 탑 수술(트랜스 남성이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희망하는 성소수자 환자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그러다가 성확정 수술을 바라는 환자들이 생겼고, 결국 센터까지 세우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병원이라면 성소수자 환자를 치료하는 센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확정 수술을 받은 첫 환자가 나타나자 입소문 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김 교수는 "처음 수술한 환자 덕분에 지금이 있는 것"이라며 "뭘 믿고 여기까지 와주셨는지 감사할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환자가 스승이라고 말했다.
센터가 위치한 성형외과의 풍경을 보면 일반 의료 시설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①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 '모두의 화장실'이다. 또 ②간호사들 업무 공간에 설치된 유리 판에는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하늘색, 분홍색, 하얀색의 '트랜스젠더 자긍의 깃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스티커에는 "트랜스젠더의 목숨도 중요하다(Trans Lives Matter)"라고 적혀 있다.
복도에는 ③무지개 리본을 단 조형물이 자리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만큼 다양한 지향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성소수자의 상징이다. 조형물 아래로는 ④성소수자 관련 책이 진열됐다. 게이 유튜버 김철수씨가 쓴 '보통 남자 김철수'와 젠더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의 성장기를 그린 리즈 프린스의 '톰보이' 등이 있다. 김 교수의 진료실 입구에는 '모두를 환영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차별 없이 진료하겠다는 일종의 서약이다. 진료실에 들어가면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무성애자 자긍의 깃발이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김 교수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는 무지개와 함께 지팡이를 휘감은 뱀이 그려져 있다. 지팡이와 뱀은 의료인을 상징하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그가 단 배지는 성소수자 친화적 의료인을 뜻한다. 성소수자 환자들이 편안하게 센터를 찾을 수 있도록 고안한 끝에 '앨라이(동맹이라는 뜻으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 닥터'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김 교수는 "어느 날 성확정 수술을 받은 환자가 일반 진료를 받고 싶어 했다"며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 다른 환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협진 의뢰서를 냈더니 날마다 다른 교수님들이 오셨다"며 "환자분이 모든 교수님들이 다 차트를 봐야 하는 건지 물어왔다"고 했다. 사생활 보호가 중요한 환자 특성상 전담 의료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온라인 등록 시스템도 신경을 썼다. 센터에서는 성별이나 이름 등 환자 정보를 따로 올리고 있다. 성소수자 환자들의 경우 법적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이름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환자들의 사정을 고려한 것.
센터에 방문한 환자들은 본격 상담 전 진료 카드를 받는다. 카드에는 자신의 원하는 이름과 상담하고 싶은 내역을 쓸 수 있다. 간호사들은 이를 보고 응대한다. 더 이상 "거기 앉아 계신 남자분"이라며 지정 성별(주민등록 시 지정된 성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센터 의료진은 정기적으로 성소수자 감수성 교육도 받는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환자가 원하는 성별을 등록하는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김 교수는 "전산팀에서 절대 바꿀 수 없다고 완강하게 나왔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말했다.
국내 성소수자 의료의 현주소는 여전히 열악하다. 김 교수는 "외국은 수술할 수 있는 의사는 물론이고 코디네이터,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들이 팀이 되어 움직인다"고 소개했다. 또 시설과 직원 교육에서의 성소수자 친화성을 평가하는 '성 평등 지수(Gender Equlity Index)'를 인증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런 제도가 없다. 그는 "현재 센터에서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지표를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테스트가 성공하면 전국 병원에 배포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성확정 수술은 수술 자체만 해도 성형외과, 외과, 비뇨의학과, 산부인과 등이 협력해야 한다. 수술 전에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고 수술 후에는 내분비 내과에서 호르몬 치료를 받는다. 이렇게 다양한 진료과가 손잡기 위해서는 대학병원 정도의 규모가 필요하다. 김 교수가 개인병원을 포기하고 강동성심병원에 온 이유기도 하다.
센터는 조만간 각 분야의 전문의가 모여 환자에 대해 논의하는 다학제 진료를 도입할 계획이다. 김 교수는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진료과 전문의들에게 서로 요구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될 것"이라며 "지금까지 환자를 하나의 케이스로만 봤다면 이제는 다양한 시각에서 한 사람의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환자도 함께 참여하면서 자신이 받는 치료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해외 연수도 국내 성소수자 관련 의료 현실을 개선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김 교수는 성확정 수술로 잘 알려진 벨기에의 겐트대 병원에서 3개월 동안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그는 "이제는 수술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술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단계가 됐다"며 "단순히 케이스만 많아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겐트대에서) 수술 테크닉도 배울 수 있겠지만 성소수자 의료 시스템을 배워 국내에 안착시켰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4일부터 성소수자 코디네이터를 모집하고 있다. 센터가 생긴 지 1년이 넘자 환자 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 김 교수는 "병원 코디네이터라고 하면 서류 작업과 환자 진료에 모두 투입할 수 있는 간호사를 주로 뽑는다"며 "병원 측에 진료는 알아서 볼 테니 행정 업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지원 자격은 고졸 이상이면 된다고 한다. 이를 본 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자는 "(대학을 가지 않은) 나도 지원할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김 교수는 "(코디네이터는) 성소수자를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만 있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모집 공고를 보면 우대 조건에 '성소수자 당사자 혹은 성소수자 관련 비영리단체 활동 경험'이라고 쓰여 있다. 일반 채용 공고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우대 조건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김 교수는 "성확정 수술은 환자 본인이 선택한 수술이다 보니 수술 전후로 조율할 것이 많다"며 "일반 수술과는 진행 과정이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원래는 병원 대표 번호로 전화해서 콜센터 상담원 중 한 명이 무작위로 전화를 받는다"며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번 채용은 성소수자들을 잘 아는 코디네이터와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전담' 문의 창구를 만드는 작업이다. 김 교수는 "여러 진료과의 협진이 필요한 성확정 수술 특성상 환자들이 여러 공간을 오가야 하는데 환자들의 혼란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실 김 교수는 성소수자 당사자를 우대 조건으로 내거는 것이 맞는지 주저하기도 했다. 지원자가 아웃팅(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알려지는 것)을 당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굳혔다. 김 교수는 "성소수자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면 인생 상담에 가까워진다"며 "얘기를 들어보면 일자리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에 따르면 성확정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주민등록상 성별을 정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수술을 받지 않은 성소수자들은 이력서 제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국내에서는 성확정 수술은 보험 처리도 되지 않는다. 즉 수술 비용조차 벌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 교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성소수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는 세계트랜스젠더건강전문가협회(WPATH)를 통해 성소수자 당사자들을 구인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 온다"는 그는 "우리나라도 직업 훈련과 구인·구직이 자유로운 커뮤니티가 있어서 성소수자들끼리 서로 도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누리꾼 A씨는 센터와 김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 가족에게 커밍아웃(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할 수 있었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레즈비언 B씨는 김 교수가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닥터 결희킴 티비'에 "의료계가 보수적이라 성소수자를 위한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있었다며 "실망만 하다가 오랜만에 위로를 받았다"고 댓글을 남겼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제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며 "센터는 아직까지 깍두기처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꿈꾸는 병원을 설명했다. "센터 단독 건물이 하나 있고 벽에서부터 퀴어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있으면 좋겠다"며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성소수자를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