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 아파트 앞 길거리에서 60대 남성이 무차별 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사람 왕래가 적지 않은 장소에서 출혈이 심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지만, 50명도 넘는 행인들의 외면 속에 17분가량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11일 오전 중국 국적의 40대 남성 A씨를 살인 및 폭행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A씨는 이날 오전 6시쯤 구로구 구로동 도로에서 B씨를 여러 차례 발로 차고 도로 경계석(연석)으로 때려 숨지게 하고, 인근에서 고물수집상 C씨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마약 정밀 검사를 의뢰한 결과 A씨 체내에선 필로폰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가 현장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A씨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B씨에게 다가가 여러 차례 발길질을 하고 쓰러진 B씨의 주머니를 뒤져 소지품을 챙겼다. A씨는 잠시 B씨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옆에 놓인 연석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 A씨 안면부를 내리친 뒤 현장을 떠났다. 범행에 걸린 시간은 단 1분이었다.
이른 오전이지만 범행 장소가 아파트 입구이자 공원 옆이라, 경찰과 소방이 오전 6시 17분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시민 수십 명이 B씨 곁을 지나쳤다. CCTV에 촬영된 사람만 54명이었다. B씨는 폭행당한 직후 얼굴에서 피가 분출하는 등 출혈이 심한 상태였지만, 행인들 가운데 B씨를 구조하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화면 속 한 남성은 B씨 옆을 지나는 내내 고개를 B씨 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결국 신고를 하진 않았다. 경찰과 소방이 B씨 상태를 확인했을 땐 이미 숨진 뒤였다. CCTV 화면에 신고 장면이 잡히진 않았지만, 소방은 오전 6시 9분쯤 119에 '사람이 다쳤다'는 신고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행인들이 B씨를 방치한 이유로 '만성적 치안 불안'을 꼽았다. 인근 상가 주인 C씨는 "바로 어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며 "이런 일이 빈번하다 보니 폭행 사건을 보더라도 신고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 40년 넘게 살았다는 70대 김모씨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폭행 사건이 워낙 빈번하다"면서 "매일 아침 이 공원에 운동하러 나오는데 경찰에 여러 차례 치안 불안을 호소했지만 순찰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A씨가 갑자기 B씨에게 달려든 점, 도주하다가 손수레를 끌고 있던 C씨까지 폭행한 점 등에 비춰 뚜렷한 범행 이유가 없는 '묻지마 폭행'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경찰은 A씨를 상대로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숨진 B씨는 인근 주민으로 확인됐다"며 "A씨는 주취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