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무장된 페퍼포그차(최루탄 발사 차량)에 올라탄 채 카메라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젊은 시민군. 많은 이들에겐 권력 찬탈에 나선 신군부의 무도한 폭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민주 시민의 표상이었고 누군가에겐 광주 시민군이 숨은 배후를 둔 무장 폭도라고 억측하기에 그럴싸한 증거였지만, 이 사진이 지난 42년간 5·18의 비극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대표적 상징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진 속 시민군은 그러나 '5·18 내란 수괴'들이 단죄받고 다각적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는 2015년 보수논객 지만원씨로부터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 1호'로 지목당했고, 2019년 개봉한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에선 '김군'으로 명명됐다. '김군'이 이미 계엄군에 총살당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12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김군'이자 '광수 1호'였던 시민군이 차복환(62)씨로 확인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앞서 한국일보는 차씨가 지난해 5월 처음 신분을 밝힌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반년간 차씨와 계속 접촉하면서 그가 정말 사진 속 시민군이 맞는지를 탐문해왔다. 진상조사위에서도 차씨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정이 마무리된 것으로 파악된 이달 5일, 광주 모처에서 차씨를 만나 지난 42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만 20세였던 차씨가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차씨는 석 달 전쯤 광주에 와서 광주교대 인근 공장에서 상패를 만들어 군부대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광주엔 직업군인인 친형이 살고 있었는데, 차씨뿐 아니라 다른 동생들도 형님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5월 18일 비상계엄령으로 버스가 끊긴다는 소식에, 차씨는 공장에서 서둘러 상패를 싸들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에서 군인들에게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갖고 있던 군대 상패 덕에 무사히 풀려났다. 차씨는 "그때 손을 제대로 못 닦은 상태였는데, 군인들이 (내가) 민주화운동 플래카드를 쓰다가 나와서 (자기들에게) 잡힌 거라고 시비를 걸어 기분이 나빴다"고 회상했다.
차씨가 탄 버스가 옛 전남도청 부근을 지날 무렵, 차씨는 군인들에게 속옷 차림으로 구타당하는 시민들을 목격했다. "도청 쪽에서 군인이 사람들 옷을 벗기고 11명씩 줄로 묶고 몽둥이로 때리는 걸 버스에서 봤습니다. 해도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그날 밤 차씨가 자려고 누웠을 때 집 밖에서 들려온 가두방송도 스무 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한 여성이 "지금 군인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 좀 도와달라. 나와서 참여해달라"고 연신 호소하고 있었다. 그 구슬픈 목소리에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맞던 시민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방송을 들으면서 '저들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동참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차씨는 시위 대열에 합류한 날을 5월 21일로 기억하고 있다. 집을 나섰는데 마침 시민군이 탄 군용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또래들이 트럭에 타라고 해서 올라탔습니다." 첫날은 총도 없이 트럭을 타고 광주 시내를 활보했다. 북을 두드리고 깃발도 흔들면서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날 오후 1시엔 계엄군이 도청 앞에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하며 5·18의 분수령을 이룬 만행이 벌어졌는데, 차씨는 도심이 아니라 시내 외곽을 돌고 있어서 곧바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페퍼포그차를 탄 차씨의 모습이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날은 시민군 가담 이틀째인 5월 22일이었다. 형이 "절대 항쟁에 나서지 말고 동생들 잘 챙기고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차씨는 이날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리로 나선 참이었다.
그날 차씨는 군용 트럭을 타고 화순경찰서 앞 예비군 무기고로 가서 다른 시민군들과 무기를 탈취한 뒤 광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트레이닝복 차림이던 차씨는 도청에서 군복과 군화를 받아 갈아입고 차량도 페퍼포그차로 갈아탔다. 머리엔 '석방하라. 김군'이라고 적힌 띠를 둘렀다. 김군은 당시 야당 유력 정치인으로 신군부에 의해 연행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에둘러 쓴 것이었다. 차씨는 차량 상단 사수 자리에 섰다. 다만 그는 차량에 설치된 자동 소총을 다룰 줄 몰랐고 소총 또한 기관총 탄띠를 걸쳐만 놓은 빈총이었다. 이것이 '김군 사진'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차씨가 속한 시민군 일행은 상무대 방향에서 계엄군 탱크가 몰려오자 일보후퇴한 뒤 조선대로 가서 사격 연습을 했다. 군미필자였던 차씨의 사격 실력은 엉망이었다. 그는 "총알 10발 중 한 발도 못 맞혔는데, 싸우고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쏘게 해달라고 했다"며 "총기를 M1에서 더 가벼운 칼빈으로 바꿨는데도 10발이 전부 빗나갔다"고 떠올렸다.
사격 연습장에 있던 중학생쯤 돼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차씨의 정신을 퍼뜩 깨웠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집에 두고 온 동생들 얼굴과 함께 "동생들 잘 돌보라"는 형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제서야 동생들 걱정에 총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급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니까 동생 두 명이 벌서고 있더라고요. 제가 군복 차림에 총까지 들고 오니까 형님이 더 화가 나서 심하게 혼을 냈어요. 형님이 상무대에 잡혀온 사람들은 다 죽어 나간다고, 제발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형님도 울컥해 하더라고요."
형이 집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차씨는 더는 시민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에 총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들렸어요. 나도 같이 싸워야 하는데 마음이 안 좋았죠." 차씨와 동생들은 2, 3일간 꼬박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문이 열린 뒤 차씨가 향한 곳은 도청이었다. 그곳엔 시민군 시신이 든 관이 줄지어 있었다. "관이 세 줄씩 길게 놓였는데, 벌레가 끓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다리가 풀리더군요. 도청에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엄청 울었습니다." 함께 싸우지 못한 사이 주검으로 돌아온 동료들의 모습에 차씨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매일 술로 버텼다. 그렇게 5·18 민주화운동은 끝났다.
차씨는 얼마 뒤 광주를 잠시 떠났다가 돌아와 2년 가까이 더 머무르다가 떠났다. 이후 한 번도 광주를 찾지 않았지만 항쟁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계속 그를 괴롭했다. "힘들고 짜증나서 술을 많이 마실 때면 (도청 상황을) 꿈으로 꿨습니다. (화가 나서) 깨어난 뒤 주먹으로 벽을 쳤다가 피범벅이 되기도 했죠. 이런 꿈을 20년 가까이 꿨습니다."
죄책감에 과거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다. 식당에 갔다가 TV에서 5·18 관련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껐다. 차씨 아내조차 남편이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씨 또한 자신이 '광수 1호' '시민군 김군'으로 세상에 회자되고 있다는 걸 몰랐다. 20년 전 광주 외곽 도로를 지나가며 우연히 김군 사진을 본 적 있지만, '저 사람 카리스마 있네' 하고 무심코 넘겼다고 한다.
자신이 '김군'이란 사실은 지난해 5월 배우자가 우연히 TV에서 영화 '김군'을 보면서 알게 됐다. "아내가 영화를 보면서 '이것 좀 봐라. 꼭 당신 얼굴이다'라고 했는데 마침 장면이 전환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저 사람 눈이 당신 화났을 때 째려보는 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찾아봤더니 제 사진이 나오더라고요." 차씨가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찾아봤더니 제가 광수 1호고 북한의 전 농림상 김창식이라나요.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차씨는 그달 5·18기념재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사진 속 인물의 비밀은 40여 년 만에 이렇게 풀렸지만, 그 주인공은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옛날 생각나서 기분은 안 좋죠. 그 당시 기억을 되새겨야 하니까요. 주목받은 일을 별로 안 했는데 5·18의 상징적 인물이 된 게 부담스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