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의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이는 것은 어쩐지 지금도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강수연 배우는 한국 영화사를 관통해 온 배우였고, 영화배우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부고 문자에 적힌 영화인 상으로 장례식을 진행한다는 내용을 보고 얼마나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하려 하겠는지 가늠해 보며, 강수연 배우다운 작별이라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배우라는 이름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라고 공언한 그의 꿈이 져 버린 것이 허망하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그후로도 오랫동안',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 그가 남긴 족적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반추해보게 만들었고, 영화계에서 남성성이 두드러지던 시절에도 그는 오히려 앞장서서 본인의 목소리를 내는 기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은 물론 집행위원장까지 도맡으며 오늘날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있게 한 일원이기도 했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며 늘 한편으로는 저렇게 기품 있고 투명하게 나이 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지표가 되어주는 선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제대로 된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이렇게 연애편지 같은 글을 쓰고 있자니 이 일방적이고 뒤늦은 글이 무척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아마도 강수연 배우는 예의 그 웃음으로 호쾌하게 웃으며, 고마워라며 와락 끌어안아 줄 것만 같다.
최근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여배우 기키 기린과 인터뷰를 나눈 책 '기키 기린의 말'을 읽고 있었던 터라, 그 아쉬움과 허망함이 못내 짙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기키 기린은 고레에다 감독과 12년 동안 여섯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다. 그리고 영화 '어느 가족'을 찍기 전 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고레에다 감독과는 마지막 촬영이라는 공언을 하고 작품을 촬영했다. 작품 속에서도 그는 죽는 역할을 맡았다. 작품 완성 이후, 칸 영화제 상영을 마지막으로 기키 기린은 의도적으로 고레에다 감독과의 만남을 피했다.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 대신 젊은 사람과 시간을 보내라는 당부와 더불어 자신의 쇠락해 가는 마지막을 보면 젊은 감독이 그와 이별하는 것을 더욱 힘들어할 것을 예견한 그의 배려였을 것이다.
당시 기키 기린은 내가 좋아하던 일상성의 얼굴을 한 배우였기에, 나는 다신 그의 연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작품 속에 남아 있는 얼굴은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어쩐지 더욱 그리워지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기키 기린이 젊은 감독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게끔 시간을 주었다면, 강수연 배우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마지막으로 출연한 연상호 감독의 '정이'를 시작으로 다시금 활발하게 배우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 기대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때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의 유작이 공개될 때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가 얼마나 그리워질까라는 생각도 든다.
너무 감상적이거나 거창하게 배우를 기리는 일은 어쩐지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있는 힘껏 명복을 빌겠다는 어느 감독님의 말을 빌리며, 나 역시 그다운 작별을 할 수 있게 있는 힘껏 명복을 빌려 한다. 얘기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 일방적인 편지를 늘어놓은 것, 너그러이 받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