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앞둔 경기 고양의 한 아파트 내 어린이 놀이터. 초등학생 윤예빈(8)양은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그네에서 발을 굴렀다. 윤양과 친구들에게 놀이터는 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향하는 장소다. 윤양은 "그네는 인기가 많아서 일찍 나와서 타야 한다"며 "곧 학원에 가야 하지만 코로나19가 좀 나아져서 친구들과 놀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이터에 온 윤양의 친구 김율하(8)양은 "오늘은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났으면 다른 날은 친구네 집 놀이터로 간다"며 시소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의 세상에서 미끄럼틀, 그네, 시소만큼 즐거운 게 또 있을까. 놀이터는 어린이들에게 '권리'이다.
그러나 놀이터마저 울타리를 치고 다른 곳에 사는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척하는 현상이 흔하다. 인천 부평에 사는 주부 유예인(33)씨는 "아이와 함께 동네의 브랜드 아파트 놀이터에 갔다가 경비원으로부터 '입주민이 아니면 나가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 있다"라고 전했다. 그는 "나도 인근 아파트에 살지만 우리 놀이터에 다른 아파트 아이들이 놀러 오는 일은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충격이었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지난해 11월엔 인천 A아파트의 입주자 대표가 놀이터에 온 동네 아이들을 '도둑'이라며 경찰에 신고했다. 이 입주자 대표는 이후 임시회의를 통해서 외부 어린이가 단지 내 놀이터를 사용할 경우 경찰에 알린다는 안건을 의결시켰으나 입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폐기됐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놀이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어린이 놀이시설은 7만8,000개다. 2014년 6만2,000개, 2016년 6만8,000개, 2018년 7만3,000개, 2020년 7만6,000개로 꾸준히 늘어났다. 놀이터는 계속 늘어나는데, 왜 갈등은 줄지 않는 걸까.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놀이터 문제를 짚어 봤다.
문제는 전체 놀이시설의 절반 이상인 4만800개가 사유지인 주택단지(아파트)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2년부터 늘어난 전체 놀이시설의 3분의 2가량이 주택단지 내 놀이터일 정도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서 150가구 이상의 공동주택의 경우 어린이 놀이터를 반드시 설치하도록 하면서 생긴 결과다.
현행법에서 어린이 놀이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시설은 아파트를 비롯해 어린이집, 유치원·학교뿐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도시공원은 전체 놀이터의 약 14%인 1만1,000개에 그친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 어린이에게 놀이터 접근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2019년 '도시 서울의 공간 불평등 검토'(은석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이혜림 서울연구원)에서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아파트 비율이 높은 노원구, 성동구, 강남구, 서초구, 영등포구 등은 어린이 놀이터 면적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반면 연립·다세대 주택의 비율이 높은 자치구의 경우 1인당 어린이공원 면적과 1인당 어린이 놀 공간 면적 모두 저조했다. 경기연구원의 2020년 조사에서도 빌라·다세대 주택 거주자가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육아 생활 편의시설은 놀이터였고 아파트 거주자는 도서관이라고 답했다. 거주 공간에 따라 놀이시설의 '격차'가 생겨나는 셈이다.
절반의 어린이는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살고 있다. 국내 일반 가구 중 아파트 거주 가구 비율이 51.1%(2019년 인구주택총조사) 정도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 지역사회 내 놀이 공간이 충분하다고 답한 초등학생은 59%로, 10명 중 4명은 놀 곳이 부족했다.
한국일보는 인천 A아파트, 서울의 B아파트, 경기 광명의 C아파트를 찾아가 봤다. 최근 놀이터에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몸살을 앓았던 곳들이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놀러 나온 B아파트의 주민 이정은(32·가명)씨는 "출입 금지 소식을 모르다가 나도 기사로 소식을 알았다"며 "외부인 출입 통제 현수막이나 안내문은 금방 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A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지금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놀이터에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외부인 출입을 아예 막지는 않았으나 일일 이용권을 받도록 했던 C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자유롭게 개방된 지 오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용권은) 어린이 놀이터에 청소년들이 몰리는 문제가 생겨 임시로 시행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논란이 된 곳이 바로잡혔으니 제대로 풀린 것일까. 하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놀이터에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아파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예 벽을 쳐서 출입을 통제했으면 별 논란이 없었을 텐데 아이들 놀이터를 가지고 기사를 쓰니 사람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요."
서울 B아파트의 한 주민은 놀이터 출입 금지 조치에 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동네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를 드나들면서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주차장 등을 사용하는 문제가 생겨서 아예 외부인을 막자는 얘기가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대규모 아파트를 중심으로 외부인 출입을 막는 아파트는 늘어나는 추세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2018년 4일 서울북부지법은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인근 주민들의 통행을 막는 일이 권리 남용이 아니라고 봤다.
아파트내 운동시설이나 독서실 등은 외부인에게 개방하지 않더라도 손가락질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놀이터도 그래도 되는 걸까. 실제 새 아파트의 놀이터나 새로 단장한 놀이터에 근처의 어린이들이 몰리면서 갈등이 시작되곤 한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를 두고 "어린이 놀이터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주민공동시설과 달리 법적으로 150가구 이상의 경우 어린이 놀이터와 경로당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정 교수는 "놀이터 설치를 의무 조항으로 넣은 이유는 어린이의 놀 공간을 사회가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그렇다고 '아파트에 사는 어린이'만의 놀 공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엔아동권리선언에서는 아동을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자 모든 권리를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하는 주체'라고 본다. 어린이가 차별 없이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보호와 배려, 지원'이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어린이 놀이터 출입 금지를 두고 사회가 유독 논란을 빚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린이의 어디서든 자유롭게 놀 권리가 지켜지려면 한때는 그 역시 어린이였던 '어른'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정 교수는 "아파트에 담장을 쌓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는 '단지 대(對) 단지'의 전쟁에선 결국 아파트 밖으로 나가면 그 사람 역시 외부인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자발적 배제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지 생각해볼 문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