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나의 비극과 왕들의 전쟁

입력
2022.04.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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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또 하나의 우크라이나 비극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사람들 가슴을 때리고 있다. 의사이자 아이 엄마인 올레나 쿠시니르(30)는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러시아군에 항전 중 15일 사망했다. 올레나가 숨지기 40일 전 남편도 전투 중 사망했다. 올레나 부부는 9세 아들을 두었는데 다행히 그는 안전한 곳에 있다고 우크라이나 당국은 전했다. 전쟁 중 직계 가족이 희생되면 남은 가족은 작전에 투입할 수 없지만 올레나는 아들만 피신시키고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 남부도시 마리우폴에 남은 올레나는 의무대 소속으로 부상 병사와 민간인을 치료했다. 생존자들은 올레나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증언했다. 그는 3월에는 세계인의 도움을 호소하는 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렸다. 영상 속 올레나는 전투모를 쓴 채 “러시아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모를 것이다. 폭격과 공격으로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은 토막나고 내장은 쏟아졌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미래에 마리우폴의 영웅적 투쟁을 영화, 책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오늘’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폭로한 마리우폴 비극은 지금도 끝나지 않아,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선 수천 명이 최후 항전을 벌이고 있다.

□ 전쟁을 자주 겪었던 유럽에는 교훈을 담은 속담이 많이 남아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말은 영국, 부정(不正)한 평화일지라도 옳은 전쟁보다는 낫다는 말은 독일 격언이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 전쟁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전(反戰)을 얘기했다. 전쟁의 잔인성, 불모성, 우매성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증오감으로 전쟁을 바라본다고 그는 말했다. 올레나의 비극은 이 시대 세계인들을 끔찍한 전쟁의 목격자, 반전의 증언자로 만들고 있다.

□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28일 연설에서 “전투 비용은 저렴하지 않지만 공격에 굴복하는 것은 더 비싸다”고 했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전쟁 목표가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전쟁 초기만 해도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사흘을 못 버틸 것이라고 했다. 2개월 만에 휴전도 아닌 전쟁 승리에 무게를 두는 모습은 제2, 제3의 올레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전쟁은 왕들의 거래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아 보이는 지금이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