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이 남길 여백을 그려본다

입력
2022.04.26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직업병이겠지만,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의심부터 한다. 의도된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머릿속에서 말을 한 번 거르면 ‘솔직한 감정과 생각이 감춰지기 마련’이란, 믿음 때문이다.

특히나 마이크 앞에 선 정치인의 말이라면 더더욱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을 우선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말 역시 전략의 수단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들이 가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우길 때면 모른 척 무시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닐 테니 괜한 대거리 하지 말자는 마음일 테다. 게다가 본인에게 유리한가 아닌가(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면 더더욱)를 잣대로 말을 만들어 내는 이에게 상식과 논리를 따져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여러 번 경험하기도 했다.

25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하고 나선 김오수 검찰총장의 발언에 속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박병석 국회의장의 검수완박 법안 중재안을 여야가 수용하기로 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책임지겠다”고 사표를 던졌던 그가, 며칠의 침묵을 깨고 내뱉은 말은 “저희(검찰) 의견을 반영해서 더 많은 논의가 이뤄질 거라 기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재안은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여기에 “무능하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는 자책을 더했다. 말을 들으며, ‘순진함과 무능함’ 사이 어디쯤에 그가 있었던 걸까 오랫동안 생각해야 했다. “도대체 그럼 총장은 뭘 한 거야”라는 한 평검사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검수완박 법안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이런 저런 주장이 덧대지고 해석이 쏟아지지만,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격 없는 검찰에게서 수사권을 뺏어야 한다’는 법안일 뿐이다. 지난 7일 민주당이 자당 출신의 무소속 양향자 의원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 보임한 것을 시작으로, 12일 검수완박 당론 채택, 22일 박 의장의 중재안 여야 합의에 이르기까지 보름 남짓 기간에 보인 과정을 보면 이는 더욱 또렷해진다.

종착지는 결국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이 그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운을 뗐고, 곧 여당이 될 정당은 본인의 입맛에 맞게 안을 협상해서 받아들인다는, 두 거대 정당 어느 쪽도 손해를 볼 게 없는 ‘검찰 수사권 박탈’이라는 결말 말이다.

그래서 한번 검사들을 응원해볼까 한다. “뾰족한 수는 없지만, 몸부림은 쳐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들의 말을 북돋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결국 피해는 국민들의 몫”이라는 호소도 믿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검찰이 행한 과거의 잘못이 보이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지 모르겠다. 거기엔 국회의원들도 그랬고, 청와대도 그랬고, 힘 있는 기관의 누군가는 부정을 저질러오지 않았느냐고 답해볼까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는지,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을 한 적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무엇보다 난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뺏을 때에도 지켜야 할 예의와 도리라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고정희 시인의 말을 빌려, 앞으로 몇 개월 그 여백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유권자로서, 국민으로서, 2022년 4월의 아수라장을 빠짐없이 기억해볼까 한다.

남상욱 사회부 차장
thoth@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