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구의 날.. 95장 의견서로 거대석유기업 광고 무너뜨린 네덜란드 청년들

입력
2022.04.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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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자유대 대학원생 등 화상 인터뷰]
지난해 셸을 광고심의위에 제소해 승소
삼림벌채 막으니까 석유 써도 탄소중립?
"딴지 걸고 '증명하라'고 요구해야 바뀐다"

"어느 날 집 앞에 묵직한 서류가 배달됐어요. 로열더치셸(다국적 거대 석유기업·이하 셸)이 보낸 반박 자료였죠. 솔직히 좀 위축되더라고요. 그쪽은 대기업이고 저희는 학생이었으니까요."

스물셋의 네덜란드 청년 산더 드 브리스는 지난해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2021년 4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법학대학원생이었던 그는 8명의 친구들과 함께 셸의 광고를 네덜란드 광고심의위원회에 제소했다. ‘석유를 쓰면서도 탄소중립운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이유였다.

위원회는 지난해 8월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며 셸에 광고 중단을 권고했다. 환경광고규칙 제2조 '속임수 금지' 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일명 ‘탄소중립석유’ 광고를 ‘그린워싱’이라고 공식 판단한 첫 사례다.

4월 22일은 제52주년 '지구의 날'이다. 순수 민간 운동에서 시작된 지구의 날을 맞아 세계 저편에서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페루에 나무 심는다고 네덜란드 온실가스가 사라지진 않는다

한국일보는 지난 6일 산더와 화상을 통해 만났다. 그를 도운 지도교수 클레멘스 카우파(40), 환경운동가 펨케 슬리거(48)도 함께했다.

"사실 첫 시작은 체험학습에 가까웠어요." 산더가 회상했다. 학생들이 모인 계기는 '실습프로젝트를 해보라'는 교수들의 권유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들도 '그동안 써 본 법률 지식을 한번 써먹어보자'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법원 소송 대신 광고위원회를 택한 것도 '기간이 짧고 돈이 들지 않는다'는 현실적 이유였다.

그러나 셸의 광고를 접하면서 학생들은 진지해졌다. 2019년 시작된 셸의 '탄소중립운전(드라이브카본뉴트럴)' 캠페인은 '일반 휘발유보다 리터당 1유로센트(13.39원)만 더 내면 탄소중립석유를 살 수 있다'고 광고했다. 알고 보니 탄소중립석유의 성분이나 온실가스 배출량은 보통의 휘발유와 차이가 없었다. 똑같은 석유를 팔면서도 단지 개발도상국에 나무를 심어 탄소배출량을 '상쇄'한다는 이유로 탄소중립이라 홍보한 것이다.


탄소상쇄의 과학적 근거도 부족했다. 클레멘스 교수는 "셸이 네덜란드에서 판매한 휘발유에서 나온 온실가스량이 다른 나라에 심은 나무를 통해 똑같이 흡수될 거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셸이 주장하는 '간접흡수량'은 측정도 확인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제소의견서도 이 문제에 집중했다. 이들은 2020년 11월부터 약 5개월간 머리를 맞대고 95장에 달하는 의견서를 썼다. 의견서에는 셸이 페루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한 레드플러스(REDD+)라는 숲 보호 사업에 대한 폭로도 들어갔다. 산더는 "셸의 사업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삼림벌채를 막는다는 논리인데 정작 사업지 바로 옆에서는 벌채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셸은 학생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했다. 클레멘스 교수는 지난해 7월 화상으로 진행됐던 광고심의 공청회를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셸의 대리인인 변호사들과 과학자들은 정장을 쫙 빼입고 앉았는데, 우리 쪽은 그저 한 무리의 학생들 뿐이었죠. 셸에서 위원회에 강한 인상을 심어 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더라고요."

여전히 반복되는 '그린워싱' 광고... 한국에도 등장

그러나 위원회 판단 이후에도 똑같은 그린워싱은 계속되고 있다. 산더가 우려했던 부분이다. 지난 9일에는 네덜란드 공영항공사 KLM이 탄소중립비행이라는 광고를 하다가 저지당했다. 셸도 최근 탄소'중립'을 탄소'상쇄'로만 바꾼 똑같은 광고를 내놨다가 뭇매를 맞았다. 우리나라에도 올해 초 SK에너지가 리터당 12원만 추가하면 넷제로가 된다는 '탄소중립주유' 상품을 판매했다. 이미 철퇴를 맞은 셸의 캠페인과 같은 구조다.

광고가 직접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것도 아닌데 웬 난리냐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광고가 사람들의 무의식에 스며든다는 게 문제다.

펨케 활동가는 "그린워싱 광고는 사람들에게 '환경오염을 좀 시켜도 괜찮다'는 인식을 심는다"고 꼬집었다. 일단 탄소를 내뿜어도 나무를 심으면 된다고 말하는 셸의 광고가 전형적이다. 하지만 "이미 발생한 오염을 청소할 수 있다는 건 환상"(클레멘스 교수)에 불과하다.


사실 시민들이 그린워싱에 맞서기란 쉽지 않다. 기업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문제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승리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펨케 활동가는 "이전에도 다섯 명의 소비자가 셸의 광고를 제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이번엔 학생들에 교수까지 동참해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광고 규제기관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30여 개 시민단체들도 유럽연합 차원에서의 관련 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화의 열쇠는 여전히 시민에게 있다. "우리가 한 일이 바로 그 예"라는게 산더의 말이다. 클레멘스 교수는 "소비자가 봤을 때 본능적으로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딴지를 걸고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게 그린워싱을 바로잡는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