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는 가운데 20일 오전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장중 129엔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 중앙은행은 이날 시장금리를 낮추겠다며 또다시 무제한 국채 매입이라는 공개시장조작을 실시했다. 급격한 엔저에도 불구하고 기존 금융완화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재확인한 셈이다.
이날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는 129엔을 넘어 2002년 4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어 최근 급락세에 따른 이익 실현 매물이 나오면서 다시 128엔대가 됐으나,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130엔대 돌파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연립여당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급격한 엔저에 우려를 갖고 정부로서 확실히 대응해 나가자”고 말했지만 시장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시장에선 일본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엔화 약세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미국 시장에선 긴축 전망이 계속되면서 장기금리 지표가 되는 10년물 국채 수익률(금리)이 일시적으로 2.94%까지 상승했다. 반면 일본은행은 정반대 움직임이다. 장기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지정된 금리로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는 공개시장조작을 20일 또다시 단행했다. 지난달 말 일본은행이 무제한 국채 매입을 여러 차례 단행하면서 엔저가 가속화했는데 엔·달러 환율이 129엔대가 된 날 이를 또다시 반복함으로써, ‘지켜야 할 것은 엔화 가치가 아니라 금리’라는 인식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무역적자 심화도 엔화 가치에 마이너스 요소다. 일본 재무성이 이날 발표한 일본의 3월 무역수지 적자는 4,124억 엔(약 3조9,545억 원)에 달해 시장 예상(715억 엔)을 훌쩍 뛰어 넘었다. 국제 원유가격 급등과 엔화 약세가 무역 적자 폭을 키운 것으로 분석됐다. 8개월 연속 무역 적자가 계속됨에 따라 일본의 2021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 무역수지는 2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5조3,749억 엔(약 51조6,000억 원)의 적자 폭은 7년 만에 최대다.
급속한 엔저에 시장 참가자도 당황하고 있다. 미쓰비시UFJ은행의 이노테츠 병사 수석 애널리스트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급격한 엔의 하락이 이어지고 있다. 어디까지 진행될지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금융정책 변경 등 시장 방향을 바꿀 소식이 나오지 않는 한 “달러당 130엔은 시간문제”라는 한 신탁은행 관계자의 견해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