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입력
2022.04.21 14:30
15면
정용준 단편소설 '선릉 산책'

편집자주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학원 강사를 하다 그만둔 '나'는 지인으로부터 시급이 높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는 전화를 받는다. 급한 사정이 있어 그러니 하루만 대신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얼떨결에 아이를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 9시 선릉역에서 만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스무 살의 '한두운'이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서서 11시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남자는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고 몸무게는 60㎏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답답한 헤드기어까지 한 상태였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일에는 한 가지 주의사항이 붙는다. 가끔 자해를 하니 다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산책이 시작된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은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그린 소설이다. '우직하고 착한 캐릭터'인 나는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치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발달장애인은 영구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고지식한 나는 꾀를 부리지 않고 지인의 안내대로 사람이 없는 선정릉을 걷는다. 한두운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거나 그의 무거운 가방을 대신 짊어지기도 한다. 더위를 호소하는 한두운의 헤드기어를 벗겨주는 것도, 선한 마음에서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주의나 권고를 듣지 않는 그와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침을 뱉고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 모습에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손쉽게 공감이나 소통을 말하지 않는다. 한두운은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선량한 사람인 주인공 역시 성인(聖人)은 아니다. 오히려 초점은 나와 한두운이 소통에 실패하는 데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나 서로 이해하고 친구가 되는 아름다운 장면은, 이 소설에 없다.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 더 큰 상처로 돌아오기도 한다. 처음 나는 온종일 한두운을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며 방임하는 보호자나, 친구에게 아르바이트를 떠넘기는 무책임한 선배 등과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더운 여름 날씨에 세수를 시키기 위해 헤드기어를 벗긴 순간부터는 한두운과 소통이 가능하기도 했다. 매미, 오리나무와 같은 단어일 뿐이지만 한두운이 먼저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으며 나에게 공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거나 소통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손으로 음식을 들고 뜯는 모습이나 괴성을 지르고 구역질을 하는 그를 제어하기 위해 나는 꼬집기라는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다. 한두운과 조그만 치와와가 대치할 때는 주인 몰래 개의 허벅지를 걷어차기도 한다. 이런 나의 균열은 노동이 3시간 연장되자 짜증으로 변한다. 선량한 나는 12시간 동안 계속된 돌봄노동 끝에 "조용히 해", "시끄럽다고"라고 명령한다. 그 순간 한두운은, 나와 대등한 '두운씨'에서 돌보아야 할 '애'가 된다.

주인공의 변화를 보면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을 떠올렸다. 전장연은 21년간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명절 시외버스 등을 이용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담은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하필 붐비는 출퇴근시간이나 명절에 그래야만 하냐고 말한다. 한적한 시간에 시위를 진행하면 이해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는 당연한 권리는 장애인들에게는 특별하고 지나친 요구가 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세련된 정치의 언어로 이동권 시위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시급한 사안을 먼저 처리하고 있으니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그가 전장연의 시위를 비난하자 온라인 공론장에서도 이에 찬동하는 혐오발화가 난무하고 있다. 착하고 순응적이고 언어를 갖지 않을 때만, 장애인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두운과 놀이터에서 시비가 붙은 소년들은 싸움으로 이기지 못하자 "병신새끼들"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후 한두운은 자신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상대를 다운시키겠다는 의지가 실린 정확하고 강한 펀치'는 스스로를 향했다. 침을 뱉거나 자해를 하는 것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계에 대한 그 나름의 응전이다. 비장애중심주의의 한국 사회에서 온화하고 '문명화된' 방식 자체는 한두운들의 입을 막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때론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 더 정치적인 언어가 된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주인의 무기로는 주인의 집을 허물 수 없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