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에서 머리 나오는 얘기를 누가 싫어하겠어요?"

입력
2022.04.1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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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선정된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ㆍ안톤 허 번역가


“‘저주토끼’의 무엇을 보고 번역을 결정했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황스러워요. 저에겐 너무 당연하거든요.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 얘기를 누가 싫어하겠어요? 너무 재미있잖아요.”(안톤 허)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저주토끼’ 기자 간담회에서 정보라 작가와 안톤 허 번역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저주토끼’가 지난 7일 발표된 영국 부커상 최종후보에 선정된 것을 기념해 열렸다. 해당 부문에 한국 작가의 작품이 오른 것은 2018년 한강 작가의 ‘흰’ 이후 4년 만으로, 만일 최종 수상까지 할 경우 2016년 ‘채식주의자’에 이어 부커상을 수상한 두 번째 한국 작품이 된다.

‘저주토끼’는 2017년 국내 출간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부커상 후보 선정으로 인해 재조명을 받게 됐다. 정작 정 작가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는 부커 재단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쓸 때는 그렇게까지 위대한 의도를 갖고 쓰진 않았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저주토끼’는 제가 쓴 많은 이야기 중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대한 저주만 모아 보자는 출판사의 기획으로 엮인 책”이라며 출판사에 공을 돌렸다.


‘저주토끼’가 해외에서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던 비결로는 ‘아이러니가 강한 문체’를 꼽았다. 안톤 허는 “정보라 작가의 경우 아이러니가 강한 문장을 많이 쓰는데, 아름다우면서 무섭고, 공포스러우면서 유머러스한 정서가 한 문장 안에 담겨 있다”며 “이런 반어적인 문장은 한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정보라 작가의 경우 해외문학에 워낙 친숙하기 때문에 이런 문장에 익숙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해 “제가 혁명 직후의 슬라브문학을 전공했는데, 그 당시는 다양한 예술적 실험이 자유로웠고 국가적으로 장려됐다”며 “그런 자유로움이나 엉뚱한 상상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톤 허는 “형식적인 면, 문학적인 면, 스토리적인 면까지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잘 될 책이었다”며 “제가 이 책을 먼저 번역하게 된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전까지 주로 해외에 소개했던 한국 문학과는 결이 다른 작품이라 성공이 가능했다고도 봤다. “저에게 SF는 확고하게 ‘잘 먹힐 것 같은’ 장르예요. 한국에 훌륭한 SF작품도 많은데 왜 번역이 안 되는지 오히려 이상했을 정도라 이 작품의 성공이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 장르 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증거가 바로 부커상 노미네이션인 것 같아요.”

수상 가능성에 대해 안톤 허는 “올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7명의 번역가가 서로 다 아는 사이인데, 각자의 노고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상을 타고 싶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가 없다”며 “정말 솔직히 누가 타도 내가 탄 것처럼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평소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은 정 작가는 세월호 진상 규명 집회와 차별금지법, 중대재해처벌법, 장애등급제 폐지,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 참여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날도 평소 즐기는 취미를 묻는 질문에 “데모”라고 답했을 정도다. 그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유사하기 때문에 현지 상황을 잘 읽을 수 있다”며 “앞으로도 소수자 고통과 상실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고 말했다.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 정 작가는 “제가 포항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곳에서는 제사상에 나만 한 문어가 올라오는 게 신기하더라”며 “문어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고, 앞으로 상어, 멸치, 김 등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화장실에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웃음)”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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