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계 제약회사 직원 A(33)씨는 최근 헤드헌터의 이직 제안을 거절했다. 현재 재직 중인 회사보다 높은 직급과 연봉을 제시받았지만, '전일 출근'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A씨는 "현재 회사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자율근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며 "연봉이 20~30% 올라도 재택근무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 인터넷 기업에 근무 중인 김모(37)씨는 최근 회사의 재택근무 종료 방침에 이직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2년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반려동물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 좋았다"며 "재택근무를 계속 허용하거나 반려동물과 함께 출근할 수 있는 기업으로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전환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근무환경을 둘러싼 기업과 직원 사이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대다수 기업이 업무효율성을 이유로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 시점을 저울질하자, 그간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직원들이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고 있어서다.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사이에서는 업무 못지 않게 '웰빙'에 우선순위를 두는 문화가 강해, 일부 우수 인재들은 아예 '재택근무 여부'를 최우선 입사 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출근과 재택을 병행한 하이브리드 근무 도입 등 '업무 환경의 대전환' 검토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직장인을 중심으로 사무실 출근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해외에서도 포착된다. 최근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가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 5,88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재택근무자의 78%가 ‘팬데믹이 끝난 뒤에도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는 1년 전(64%)에 비해 14%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특히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MZ세대의 반발은 상당하다. 이들에겐 팬데믹 2년을 거치면서 삶의 중요도가 승진과 성공에서 건강 및 가족, 여가로 더 옮겨갔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가 발표한 '2022 워크 트렌드 인덱스'에 따르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직장인의 53%는 일보단 웰빙을 중시하게 됐다고 응답했다. 게임업계 종사자인 B(39)씨는 "지난 2년간 자율근무제로 아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다시 사무실 출근으로 돌아간다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기업들은 이미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태세다. 재택근무로 떨어진 업무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매출 100대 기업을 조사한 결과, '코로나 상황이 해소되면 예전 근무 형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답변이 56.4%로 나타났다. 포스코가 이달부터 재택근무를 종료했고, 다른 대기업도 출근 전환 시점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일각에선 보안 문제 때문에 재택근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근 재택근무를 도입했다가 회사기밀을 유출하려는 시도가 적발되면서 다시 정상 출근 체제로 전환했다. 원격업무시스템으로 캡처를 금지하는 기능을 마련했지만, 해당 직원은 이를 일일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사무실 출근을 강행하기도 부담이다. 이직이 잦은 정보기술(IT)과 마케팅, 홍보업계 등에선 엔데믹 이후 재택근무 여부가 임직원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직을 결정할 때 재택근무 여부가 연봉만큼 중요한 기준이 된 셈이다. '재택근무'를 무기로 인재 영입에 나선 기업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달 공개채용에 들어간 NHN클라우드는 '주4일 재택근무'를 내세웠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전면 재택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 사무실 출근 등 근무체계에 따른 '호불호'가 갈린다. 코로나19 이후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은 업무를 배우고 직장에 적응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입사 2년 차를 맞이한 개발자 김모(28)씨는 "온라인 회의로 업무를 배분하다 보니 중요도가 떨어지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동료와의 관계도 어색해지고 적극적으로 일을 배우면서 성과를 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낀 중간관리자들도 울상이긴 마찬가지다. 팀 내 협업을 통해 성과를 내야 하는데, 화상회의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MS에 따르면 매니저급 직원 중 74%가 "본인에게 자신의 팀을 변화시킬 영향력이 없다"며 팀 장악력이 낮다고 응답했다.
이에 기업들은 업무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임직원의 이탈을 막기 위한 대안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네이버는 최근 근무체계를 새롭게 설계하고 있다. 직원 설문조사에서 필요에 따라 사무실·집에서 일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선호한다는 응답이 52.2%, '주5일 재택근무' 선호 응답도 41.7%에 달했기 때문이다. '주5일 사무실 출근'을 선택한 직원은 2.1%에 불과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하이브리드나 전면재택으로 하나의 틀에 모두를 묶어넣는 건 '구시대적'"이라며 "개인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식으로 새 근무제를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의 정의도 다시 논의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재택근무를 정식 근무 형태로 인정하기로 한 SK텔레콤은 서울 신도림과 경기 성남, 일산 등 수도권 3곳에 거점 오피스 '스피어'를 마련했다. 직원이 본사까지 출근하지 않고도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 지난 12일 방문한 서울 신도림 스피어에선 업무공간 혁신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신분증 없이도 인공지능(AI) 안면인식 시스템을 통해 출입 및 자리 예약이 가능했고, '도심 속 정원'이라는 공간개념에 걸맞게 탁 틔인 전경과 녹색 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가상현실(VR) 장비 '오큘러스 퀘스트2'를 착용한 채 팀 회의를 진행 중인 직원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선 만난 한 직원은 "거점 오피스가 생기면서 출근 시간이 1시간 10분가량 줄었다"며 "개인 노트북을 들고 오지 않아도 업무가 가능한 시스템도 구축돼 편리하다"고 전했다. SK텔레콤은 이 스피어 공간 마련에 20여 명의 전담 인력까지 투입했다.
고정적인 사무실 공간에서 탈피하고 유연근무제 도입에 나선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도 눈에 띈다. AI스타트업 업스테이지는 언제 어디서든 업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재택근무 환경이 여의치 않은 임직원을 위해 공유 오피스, 카페 등 공간 비용을 지원하거나 재택근무 환경 조성을 위해 500만 원을 현금으로 주고 있다.
업스테이지 관계자는 "슬랙이나 노션과 같은 원격근무 솔루션과 함께 줌을 통해 실시간 화상회의를 하고 있어서, 재택근무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이에 서울 수도권은 물론 제주, 울산, 부산 등 다양한 지역에서 근무 중이고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 근무하는 임직원도 전체의 10%가량 된다"고 말했다.
아예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에 사무실을 이전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임직원들에겐 출·퇴근 시간을 줄여주고 회사엔 사무실 임대 비용 절감 효과까지 가져다주고 있어서다. 또 공간적 제한 때문에 채용할 수 없었던 해외 인재 영입 역시 긍정적인 효과다. 인터넷 부동산 플랫폼 기업 직방의 임직원 300여 명은 서울 강남역 사거리 사옥을 그대로 재현한 '메타폴리스'란 가상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엔데믹과 디지털 전환 등을 계기로 근무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업무 생산성과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 직원들의 복지 등 새로운 관점으로 근무 방식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진단에서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업무 형태에 따라 생산성이 높은 효율적인 방법을 근무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며 "재택근무와 대면근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식이 향후 일반적인 근무 형태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오성미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모던워크 사업팀장은 "지난 2년간 비대면 근무가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더 효율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기업과 임직원 모두가 체감했다"며 "위기대응 관점에서 시작된 재택근무지만, 이젠 조직의 디지털 문화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