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활동비의 정치적 논쟁을 종결시키려면 성역 없이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게 우선입니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지난 6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최근 불거진 김정숙 여사의 의상비 논란에 따른 청와대 특활비 공개 소송에 대한 질문에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1999년부터 예산 감시 활동을 했고, 이후 20년 넘게 청와대·국회·검찰의 특활비 공개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터라, 문재인 정부의 대응 방식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한국납세자연맹은 지난 2월 청와대를 상대로 김 여사의 의상비 사용 의혹과 관련한 특활비 공개 소송을 제기해 법원으로부터 1심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법원은 "일부 개인정보 부분을 제외하고 (특활비 사용과 관련한) 정보가 공개되는 게 타당하다"고 봤다.
청와대는 그러나 '국가 안보 등 민감한 사항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문 대통령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관련 기록물은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될 공산이 크다.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될 경우 최장 15년(사생활 관련 기록물은 30년) 동안 비공개 대상이라 해당 정보는 사실상 공개가 불가능해진다.
하승수 대표는 "박근혜 정부 특활비의 맹점을 지적했던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의 비공개 행태를 답습하고 있어 안타깝다"라며 "최소한의 정보조차 공개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진영 논리에 편승한 정치적 혼란만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활비 문제가 정권에 관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단체와 예산 전문가들은 국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관리감독 체계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정보 및 사건수사’ ‘외교·안보’ 등 국가 기밀유지를 위한 경비 명목으로 매년 수천억 원이 혈세로 지급되고 있지만, 정보공개는 철저히 차단돼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는지, 그 돈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는지, 특활비를 사용하는 기관 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 심지어 청와대 특활비를 공개하라는 법원 결정에도 항소 및 재판 지연을 통해 관련 기록을 국가기록원으로 보내고 있다. 제대로 사용될 것으로 국민들이 믿고 맡긴 특활비가 '묻지마 쌈짓돈'으로 변질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 특활비 공개 소송을 제기했던 하 대표는 1심 법원에서 공개 판결을 받아냈지만 결국은 '원했던 정보'를 볼 수 없었다. 항소심 재판 중 정부 측이 △대통령 직무상 기록물 공개에 관한 법규 △공공기관 정보공개에 관한 법규가 해외에는 어떻게 적용됐는지 확인해 보겠다면서 각국 대사관에 사실확인서를 보내면서 시간 끌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재판부로 확인서가 올 때까지 수개월이 걸렸고, 그사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 특활비는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돼 이관됐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소장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 특활비 소송 진행 과정이 박근혜 정부와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됐다"라며 "새 정부 출범 즈음에 대통령기록물 지정과 이관 등의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정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는 특활비 전용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특활비 규모를 줄이고 감사 제도를 도입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를 '반쪽짜리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청와대가 "매년 감사원 감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지적도 받은 바 없다"고 자랑하고, 각 부처 특활비 규모가 2017년 4,007억 원에서 올해 2,396억 원으로 줄어들었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국민의 알 권리는 전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승수 대표는 "각 기관이 감사원과 협의한 '자체 지침'을 준수했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감사원이 직접 특활비 증빙에 대해 어떻게 감사했는지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들은 무엇보다 영수증 증빙과 같은 이른바 '정보값'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청와대·국회·법원·검찰 등 입법·사법·행정부에 배정된 특활비가 사후에 어떤 식으로 증빙 처리됐는지 또는 구체적 용처는 공개하지 않더라도 증빙 처리가 확인됐다는 정보는 알아야, 적법한 용처에 사용됐다는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진임 소장은 "기본적인 정보값이라도 있어야 특활비에 대한 정보공개청구가 가능한데, 현재는 정보 자체가 없다"라며 "국가기밀이라 특활비가 어디에 얼마나 쓰였는지 공개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영수증 유무 같은 정보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국의 정택수 부장 역시 "최소한의 증빙을 남겨야 과거 문제 됐던 금일봉, 회식비, 전별금 등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감시 제도도 체계적으로 손볼 필요가 있다.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은 "감사원 특활비 업무 지침을 변경해, 영수증 첨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기관에 대해선 차후 예산 편성 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국민소송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특활비가 국민 세금으로 편성된 만큼, 정부기관의 자체 감시와 별도로 국민들에게도 감시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소송제도가 도입되면 위법한 재정행위를 한 정부기관을 상대로 국민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게 가능해져, 특활비 사용 기관과 이를 감시하는 기관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시민단체 주장이다.
국민소송제도는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납세자 소송' 이름으로 국정과제에 포함됐지만 공직사회 반발로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도 초기엔 해당 제도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소송 남발과 행정 위축 등의 우려 탓에 흐지부지됐다.
시민단체에선 정보공개도 하지 않은 채 '특활비를 제대로 썼으니 믿어달라' 식의 설명도 지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진임 소장은 "예산 편성 업무를 담당한 국정원과 감시를 총괄하는 감사원이 최소한의 정보 제공을 통해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