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값에 청와대 특수활동비가 전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집행 내역을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 대통령 역시 야당 대표로서 특활비의 맹점을 지적했지만, 퇴임을 한 달 앞두고 똑같은 문제로 도마에 오른 셈이다.
특활비는 기밀성을 이유로 편성·집행·결산 전 과정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규정을 따르다 보니 '깜깜이 예산'이란 비판을 끊임 없이 받아왔다. 매년 수천억 원대 혈세가 권력기관에 할당되지만 어디에 썼는지 알릴 필요가 없어 '쌈짓돈'처럼 사용됐다. 특활비가 정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태생부터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활비는 말 그대로 '특수한 활동에 지원되는 비용'이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정보기관과 군부대 등 행정부 산하 소수기관에 한정해 배정됐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입법부(1994년)와 사법부(2014년)에도 배정됐다.
특활비 지급 근거는 국가재정법 44조에 따라 기획재정부가 매년 각 기관에 통보하는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이다. 지침에 따르면 특활비는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수사, 기타 이에 준하는 외교·안보, 경호 등 국정수행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로 규정돼 있다.
한국일보가 10일 기재부 재정통계를 분석한 결과, 2013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 특활비 명목으로 배정된 예산은 총 5조7,144억 원에 달했다. 2013년 8,509억 원에서 2017년 8,938억 원까지 매년 증가했으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국가정보원 예산이 '안보비'로 바뀌면서 특활비 명목의 예산은 2018년 3,168억 원으로 줄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이 청와대에 특활비를 상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결과였다. 이후 특활비 예산은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올해는 2,396억 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특활비가 지급되는 주요 기관은 △대통령비서실 및 국가안보실(82억5,070만 원) △대통령경호처(67억5,450만 원) △국방부(1,134억1,700만 원) △경찰청(715억 4,027만 원) △법무부(182억706만 원, 검찰 몫 80억 원 포함) △국회(9억8,000만 원) 등이다. 지난해 출범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올해 1억2,300만 원을 배정받았다. 국무조정실 및 국무총리비서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감사원, 국세청, 관세청, 외교부, 통일부, 해양경찰청에도 억대의 특활비가 책정됐다.
눈에 띄는 기관은 국정원이다. 예산 전액이 특활비로 편성되던 2017년까지는 4,900억 원 수준으로 여타 기관보다 월등히 많았다. 다만 국정원 특활비 자체가 폐지되고, 2018년부터 별도 항목인 '안보비'가 신설되면서 표면적으론 특활비를 받지 않게 됐다. 국정원 공식 예산인 안보비는 2018년 4,630억 원에서 매년 증가해 올해 8,312억 원까지 늘었다.
그러나 국정원 특활비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보비 중 일반 운영경비의 경우 집행·증거서류를 구비하도록 했지만,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기밀유지가 필요한 경우'에 한해선 여전히 특활비 규정을 준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경찰청, 법무부 등의 특활비에도 비공식 예산으로 국정원 몫이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막대한 돈이 국정원의 특수 목적 활동비로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국가기관에 지급되는 특활비는 어떤 용도로 사용될까. 특활비는 포괄적 분류에 따라 '총액'으로만 편성되고, 업무상 필요하면 각 기관에서 자율적으로 지급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기재부는 지침을 통해 간담회, 화환·조화, 축·조의금을 비롯해 계도·단속, 비밀을 요하지 않는 수사·조사활동 등에는 특활비 사용을 자제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비교적 투명성이 높은 업무 추진비와 특정업무 경비 등으로 집행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특활비가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된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수두룩하다. 직원들에게 전달되는 금일봉과 회식비, 전별금은 물론이고, 기관 차원의 뇌물성 상납금까지 다양하게 전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는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퇴임 후 대통령에게 주려고 했다"며 대통령 특활비 12억5,000만 원을 횡령해 차명계좌에 보관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정원 특활비 6억 원과 1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정숙 여사 논란과 유사하게 김윤옥 여사도 명품 구입에 국정원 특활비를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선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에게 1,680만 원의 특활비를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형사처벌을 받았다. 당시 총리실 직원들은 특활비를 청와대 비서관에게 매달 떼주는 게 '관행'이었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안봉근·이재만·정호성 비서관과 함께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36억5,000만 원의 특활비를 상납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이렇게 청와대로 흘러들어온 특활비는 사저 수리비, 기치료 및 주사 비용, 의상비, 격려금 등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국정원 예산증액 대가로 특활비 1억 원을 건네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회식자리에서 검사들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특활비를 줬다는 이른바 '돈봉투 만찬' 논란이 불거지자 직접 감찰을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또한 김정숙 여사의 의상·액세서리 구입 등에 특활비가 쓰였다는 의혹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월 청와대 특활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청와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다.
이처럼 정권마다 특활비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처 증빙이 투명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감사원이 2018년부터 '특수활동비에 대한 계산증명지침'에 따라 집행 실태를 점검하고 있지만 투명성을 보장하기엔 역부족이다.
원칙적으론 특활비 집행 시 영수증과 집행내용 확인서를 증거서류로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예외가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지급 상대방에게 영수증을 교부하는 게 적당하지 않은 경우 △수사 및 정보수집 활동 등 용처가 밝혀지면 경비집행 목적 달성에 현저히 지장을 받을 경우에는 사유와 금액, 지급 상대방만 간략히 명시하면 증빙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특활비를 배정받는 기관이 예외 규정을 원칙처럼 인식하다 보니, 제대로 된 감시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회에 제출되는 부처 결산 내역의 경우, 세부 증명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 감시 효과가 없다. 감사원 점검 또한 각 기관이 감사원과 협의한 '자체' 지침에 맞게 운영됐는지 검증하는 식이라 결국 기관 내부 규정이 바뀌지 않으면 투명성을 담보할 수 없다. 기재부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대부분 기관들에선 특활비를 영수증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활동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
전문가들은 특활비를 없애지 않을 거라면, 강력한 통제 장치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은 "특활비 오·남용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는 잘못된 제도의 전형"이라며 "감사원조차 제대로 된 감사를 할 수 없을 정도라면, 예산 배정 자체가 문제"라고 짚었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또한 "불필요한 기관에도 여전히 특활비가 제공되고 있고, 정보기관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검증·통제 장치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