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의 미래에 예비된 것이 피할 수 없는 종말이라면, 대홍수와 대화재, 병충해와 기근이 끊이지 않고, 물고기는 사라지고, 꿀벌은 폐사하고, 온난화와 사막화가 계속되고, 전쟁과 질병과 재해가 거듭될 뿐이라면. 그 미래를 미리 내다본 ‘예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SF 소설선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에 실린 우다영의 중편 소설 ‘긴 예지’는 종말이 임박한 미래를 보게 된 예지 능력자들이 “미래를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난 미지로 끌고 가기 위해” 사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예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지 능력을 이용해 ‘집단 예지’를 형성하면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데이터화한 ‘예지 인공지능’을 통해 종말을 막고자 한다. 예지자 중 한 명인 효주는 미래의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를 봐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66만 번의 삶을 다시 살기로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에 실린 이 작품은 앞으로 출간될 단행본의 ‘프롤로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긴 예지’를 포함해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 (조예은 ‘돌아오는 호수에서’, 문보영 ‘슬프지 않은 기억칩’, 심너울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박서련 ‘이 다음 지구에서 태어나면’)은 모두 앞으로 출간될 단행본들의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다. 커다란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또는 방대한 세계관에 대한 힌트이기도 한 작품만을 모은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은 새롭게 론칭되는 '초월 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책이다.
‘초월 시리즈’는 2019년 김초엽 작가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우빛속)을 통해 한국 SF문학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허블 출판사가 새롭게 선보이는 SF 시리즈다. ‘우빛속’ 인기에 힘입어 그해 온라인 서점의 장르문학 판매량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허블을 비롯한 다양한 SF전문 출판사들을 구심점으로 수준 높은 SF작품이 쏟아지며 한국 SF문학은 전에 없던 전성기를 맞았다.
허블 출판사는 나아가 기존의 장르 문학과 순문학의 경계 자체를 아예 무화시키겠다는 포부를 담은 ‘초월 시리즈’를 선보인다. 5일 열린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허블 관계자는 “이제 장르 간 차이라고 할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만 있을 뿐이다. 개념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문학의 경계를 지우고, SF를 쓰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세계관을 존중받을 수 있는 시리즈를 선보이고자 한다. 작가들이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출판사가 판을 까는 것이다”고 초월 시리즈에 대해 소개했다.
허블의 설명처럼, 한국 SF는 이제 한국 문학의 변방이던 시절을 지나, 명실상부 한국 문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앞으로 초월 시리즈를 통해 작품을 선보이게 될 14명 작가의 면면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조예은, 심너울, 천선란처럼 SF문학을 주로 써왔던 작가부터 전하영, 강화길, 박서련처럼 기존에는 문단 문학 작가로 분류되어왔던 이들, 나아가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문보영 시인까지 다양한 이력의 작가들이 이 시리즈에 참여한다.
SF 문학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 역시 한층 자유로워졌다. 간담회에 참석한 박서련 작가는 “우리는 전통적인 문학의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러 영상물이나 문화 콘텐츠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며 “문단 작가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문학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 것이라고 보고, 누구라도 이 K-SF의 흐름에 탑승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다영 작가 역시 “SF란 무엇인가, 순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곤 하는데, 무엇이 됐든 문학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늘 필요하다”며 “결국엔 서로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지에 대해 독자를 대상으로 경쟁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SF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박서련) 정도로 받아들이는 이 젊은 작가들에게, 장르적인 구분은 확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리고 그 무화된 경계에서 한국문학은 무한하게 확장할 것이다. 무한한 상상력의 새 판, ‘초월 시리즈’는 이번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을 시작으로 3개월에 한 권씩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