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실권자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처음 ‘핵 사용’을 입에 올렸다. 5일 낸 담화에서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오면 ‘핵전투무력’은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했다. 전쟁 발발 시 여타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바로 핵무기를 쓰겠다는 협박이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만 쏟아낸 이틀 전과 달리 어조는 차분했지만 ‘핵전쟁’ 경고는 훨씬 선명해졌다. 핵실험 등 고강도 도발의 명분을 축적하고, 새 남북관계의 기선을 확실히 잡겠다는 의도가 묻어난다.
김 부부장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전쟁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고 군사력을 보존하기 위해 핵전투무력이 동원된다”며 “남조선군은 괴멸, 전멸에 가까운 참담한 운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개전 초기부터 핵 사용을 선언한 셈이다. 그의 겁박은 앞서 3일 서욱 국방부 장관의 ‘정밀타격’ 발언을 문제 삼은 데 이은 것이다. 당시 김 부부장은 서 장관을 “미친놈” “쓰레기” 등으로 맹비난한 뒤 “남조선에 대해 많은 것을 재고하겠다”며 대남 행동을 예고했다.
달라진 점은 또렷해진 ‘조건’이다. 김 부부장은 “남조선이 설사 오판으로 선제타격에 나서더라도 스스로 목표판이 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남측이 먼저 군사행동을 할 경우 무조건 핵무력 카드를 꺼내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지난해 1월 8차 당대회에서 공개한 ‘강 대 강, 선 대 선’ 대남ㆍ대미원칙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발언의 무게는 가볍지 않지만, 표현 수위는 다소 완화됐다. 김 부부장은 노골적 ‘막말’ 대신 회유성 언사를 썼다. “남조선은 우리의 주적이 아니다” “남조선을 겨냥해 총포탄 한 발도 쏘지 않겠다”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할 같은 민족이다” 등 남측이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핵무기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어르고(압박) 달래는(회유)’ 전술은 북한의 전형적 담화 패턴이다. 당장 지난해 9월 24일 김 부부장의 직전 담화만 봐도 “종전선언은 허상”이라는 리태성 외무성 부상의 담화 발표 후 7시간 만에 그는 “종전선언은 좋은 발상”이라며 호의를 드러냈다. 이튿날 담화에서는 남북정상회담 개최까지 언급하면서 관계 개선의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러나 담화 발표 사흘 만에 북한은 단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다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전례를 보면 방점은 대화 손짓보다는 ‘도발 재개’ 쪽에 찍힌다. 이미 김일성 생일(태양절) 110주년, 건군절 90주년 등 굵직한 국가행사가 몰린 4월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추가 발사와 7차 핵실험 등 고강도 무력시위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연이은 담화는 도발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려는 명분 쌓기 성격이 짙다는 해석이다. 특히 이달 실시 예정인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은 북한에 좋은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출범을 앞둔 윤석열 정부를 길들이려는 목적도 크다. 북한이 윤 당선인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대선후보 시절 언급했던 선제타격을 거듭 문제 삼고 있는 점이 그렇다. 북한도 취임 초부터 격화하는 남북 대립은 윤 당선인의 운신 폭을 좁힐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김 부부장의 누그러진 화법에는 대화 여지도 들어 있다. 가뜩이나 북한은 경제상황이 극한에 몰려 굳이 퇴로 자체를 차단할 필요는 없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 부부장의 경고는 궁극적으로 윤석열 정부를 향하고 있다”며 “윤 당선인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대화 공간을 열어두려는 셈법”이라고 말했다.
고강도 도발에 앞서 내부 결속을 계속 시도하는 기류도 뚜렷하다. 이번 담화 역시 주민들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에 게재됐다. 보도에는 선제타격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주민들에게 ‘한미가 북한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부각하겠다는 북한 당국의 노림수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