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전이냐 타협이냐… 기로에 선 젤렌스키의 '딜레마'

입력
2022.04.05 04:30
WP "젤렌스키 정치적 시험대 놓여"
"애국심이 전쟁 종식 어렵게 해"

러시아를 상대로 결사항전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대(對)러시아 전략을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민간인 학살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러시아와의 '협상'이 시급하지만 국민들 사이에선 '항전'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은 까닭이다.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전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치적 시험대’에 직면했다”며 그가 이제 ‘항전’과 ‘협상’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분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줄곧 국민 결집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가 외국으로 도피하는 대신 수도 키이우에 남아 저항을 독려한 덕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똘똘 뭉쳐 러시아군에 맞설 수 있었다. 포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 연일 서방 지도자들과 의회에 무기와 물자 지원을 호소하며 국제사회 지지도 이끌어냈다.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초보’라는 평가를 받던 그는 6주만에 ‘위기 사령관’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민간인 희생이 잇따르고 있어 협상을 통한 평화가 급선무다. 다만 협상에서 러시아를 믿지 못하는 국민들을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는 목숨을 건 호소에 감명받아 전선에 뛰어든 국민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중단’ 같은 일보후퇴 방안을 용인할지도 미지수다.

만일 국민들이 러시아에 양보를 원치 않을 경우 전쟁 종식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키스 다든 아메리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애국심을 자극해 항거를 이끌어왔지만, 바로 그 애국심이 전쟁을 끝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의 잔혹 행위 증거가 줄줄이 나오면서 러시아와의 타협은 한층 더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협상과 휴전을 마냥 미룰 수도 없다. 세르히예 레슈첸코 대통령 비서실장은 “연일 폭격당하며 지내는 남동부 마리우폴, 북부 하르키우, 체르니히우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눈 앞의 평화를 원하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고민이 깊어진다는 얘기다. 미하일 미나코프 우드로윌슨센터 케난연구소 우크라이나 정치분석가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카리스마를 유지하면서도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일종의 (블랙 코미디 영화) ‘캐치-22(진퇴양난을 의미)’에 빠져있다”고 설명했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