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단단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으로 꼽히는 방탄소년단(BTS)은 올해도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3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제64회 그래미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후보에 오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이 부문 트로피는 '키스 미 모어'를 부른 두 여성 가수 도자 캣과 SZA가 차지했다. 방탄소년단은 시상식 후 현지에서 온라인 생방송을 통해 "아쉽게 상은 못 받았지만 큰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며 "좋은 경험이었다. 솔직히 슬프고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오늘 마음껏 해소하고 내일부터 기분 좋게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상을 받진 못했지만 방탄소년단은 3년 연속 그래미 무대를 장식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미 시상식장에서의 단독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0년엔 래퍼 릴 나스 엑스의 무대에 초청돼 공연했고, 지난해는 서울에서 미리 촬영한 영상으로 대신했다. 영화 '007' '미션 임파서블' 등을 연상시키는 콘셉트와 록 편곡의 '버터'로 무대를 장악한 이들의 퍼포먼스에 객석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고 가수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빌보드는 이날 그래미 공연 중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1위로 꼽으며 "그들의 창의성이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평했다.
시청률을 의식한 듯 주최 측은 방탄소년단에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했다. 브루노 마스와 앤더슨 팩이 결성한 프로젝트 듀오 실크소닉에 이어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두 번째로 편성했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 때도 수시로 객석에 앉은 방탄소년단을 비쳤다. 진행자 트레버 노아와 짧은 인터뷰도 마련했다. 노아는 방탄소년단 멤버 RM과의 대화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국 드라마를 보며 조금 연습했다면서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미궁화 코치 피어쑴네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흥얼거려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외에도 시상식에선 두 명의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국계 미국인 어머니를 둔 앤더슨 팩은 실크소닉으로 주요 본상 4개 중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를 차지하며 시상식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또 재패니스 브렉퍼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미셸 자우너는 그래미 4대 본상에 속하는 신인상과 베스트 얼터너티브 뮤직 앨범 후보에 올랐다. 자우너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지난해 흑인 인권 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와 관련한 공연을 마련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한 그래미는 올해도 러시아의 침공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눈길을 끌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시상식에 미리 촬영한 영상으로 깜짝 등장했다. 그는 "우리는 폭격으로 끔찍한 정적을 가져오는 러시아에 맞서 싸우고 있다"면서 "죽음과 같은 정적을 당신들의 노래로 채우고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호소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 뒤엔 가수 존 레전드가 우크라이나 출신 가수 미카 뉴턴과 함께 자신의 곡 '프리(Free)'를 연주했다.
이번 시상식에선 그래미가 '화이트 그래미'라 불릴 만큼 백인 음악가들을 편애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흑인 음악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미국 재즈, R&B 가수 존 바티스트가 최고상에 해당하는 '올해의 앨범'을 비롯해 5관왕에 오르며 최다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실크소닉은 본상 2개를 비롯해 4개의 트로피를 안았다. 장르를 초월해 시상하는 주요 4개 본상 가운데 백인 가수가 트로피를 가져간 건 신인상(올리비아 로드리고)뿐이었다.
그래미는 그간 15~30명의 익명 전문가 집단인 비밀위원회가 선정한 후보를 1만여 명의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수상자를 결정해 왔다. 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레코딩 아카데미는 지난해 5월 그래미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위원회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변화에도 지난해 전 세계적 성공을 거둔 방탄소년단을 그래미 본상이 아닌 장르별 부문 단 1개에만 이름을 올려 비영어권 가수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방탄소년단 팬 그룹인 아미는 ‘그래미는 사기’란 뜻의 ‘Scammys’(Scam+Grammys)라는 해시태그를 소셜 미디어에 올리며 반발했다. '버터'가 지난해 빌보드 종합 싱글 차트인 '핫 100'에서 총 10주간 1위를 차지하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을 뿐 아니라 영어권의 여러 매체에서 2021년 최고의 노래 중 하나로 꼽히는 등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았기에 이 같은 반발은 거셌다.
업계에선 그래미의 보수성을 감안하면 방탄소년단이 2년 연속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 교수는 "방탄소년단과 함께 후보에 오른 음악가들이 모두 쟁쟁하기 때문에 누가 수상하더라도 이견을 달기 어려웠다"며 "정상급 인기를 누린 보이밴드나 걸밴드도 그래미에서 상을 받은 예가 드물다는 것을 감안하면 방탄소년단이 2년 연속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성취"라고 강조했다.
김영대 대중음악평론가는 "레코딩 아카데미가 최근 보수성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 변화를 꾀했음에도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탄소년단의 수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