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돌마을 가는 길. 참새의 혀 같은 연둣빛 새싹이 나뭇가지에 움트고 잎이 떨어져 헐렁한 나무들 사이로 진달래 붉은 빛이 배인 봄산을 보며 충주벌에 들어서니 그림 같은 남한강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충주는 남쪽으로 소백산맥이 가로막기는 하지만 동서남북으로 연결되는 교통 중심지다. 문경으로 넘어가는 하늘재나 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가장 빈번한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작은 서울로 불릴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곳이다. 강원도 좁은 산간 골짜기를 흐르던 남한강이 죽령이 있는 단양부터는 소백산맥에 기대어 서행하다 충주벌을 만나고 달천강과 합류한 뒤 북쪽으로 여주를 거쳐 서울로 향한다.
40년 전 버스를 타고 이곳을 통해 발굴을 다닐 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 있다. 충주댐 수몰지구에서 고구려식 강돌적석총을 발굴하던 당시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금 고구려의 흔적을 더듬는 여행을 나선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에 내려 탄금대로를 타고 십 분 정도 남행하면 남한강변의 입석리를 지나게 된다. 입석리(立石里), 우리말로 '선돌마을'로 그 유명한 중원 또는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된 곳이다. 그리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곳이 칠층석탑(중앙탑)이 있는 탑평리이다.
고구려 600년의 역사를 기록한 비는 현재 세 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중 한 점이 바로 중원 또는 충주고구려비이다. 나머지 두 점은 호태왕비와 집안 고구려비로 모두 만주에 있다. 비가 고구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의 북쪽 입석마을에서 발견되었을 때 아마도 발견자들은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기쁨에 펄펄 뛰었을 것이다. 애초에 열정적인 향토사학자 모임인 예성동호회에서 창립회장인 유창종 유금기와박물관장의 환송연을 위한 답사모임에서 이 비가 발견되었다. 장준식 현 국원문화재연구원장이 단국대학교 고 정영호 교수에 제보하여 고 황수영 교수가 처음으로 해독을 시도하였다.
신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초기 해독과정에서 또 하나의 진흥왕순수비일 수 있다는 기대를 했는데 정작 비문을 해독해 보니 고구려비로 판명이 났다. 충주에 고구려비라니...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발견이었다. 1971년 백제무령왕릉 발굴에서 고대 백제사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듯이 1979년 발견에서는 고구려사가 남쪽 깊숙한 곳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에서도 고구려의 흔적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충주의 동쪽 두정리에서 발견된 횡혈식 석실분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일 것이다. 비가 서 있는 곳과 인접한 탑평리 발굴에서도 고구려 온돌 유구나 고구려 양식의 연화문와당이 발견되었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호로고로성을 비롯해 고구려를 지키는 적벽 위 방어성들이 늘어서 있고 한강으로 내려오면서 아차산 보루 등 교통로 방어 목적의 고구려 유적들이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서 충주고구려비가 위치한 입석리까지의 거리는 120㎞가 넘지만 이 구간에서는 아직 분명한 고구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같이 휩쓸고 오고 간 것일까? 고대 삼국 항쟁사에서 흥미로운 상상이 떠오르게 하는 충주로의 고고학 여행길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의 삶의 흔적은 바람 앞의 재처럼 흩날리며 사라지지만 금석문은 남아서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풀면 수수께끼 같은 해답을 주기도 한다. 글자 한 자가 갖는 의미가 심오할 수 있다. 오랜 세월에 표면의 마모가 심해 글자를 분명하게 읽어낼 수 없는 비를 쳐다보는 것은 또 다른 고고학 기행이다. 많지 않은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 사이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는 것이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지상에 드러난 것은 사람 키보다 작은 이 비에서 발견 첫해인 1979년 400자 정도가 확인됐지만 판독된 것은 200자 정도다. 금석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그대로 보존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후 다양한 노력으로 좀 더 읽은 글자도 있고, 글자가 두 개의 면이 아니라 네 개 면에 새겨졌으며 도합 730여 자로 구성됐다는 사실도 알아내기는 했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은 글자를 학자마다 다르게 읽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다. 글자만 희미해서가 아니라 이 비는 한자와 이두(吏讀)문이 혼합되어 사용된 탓에 해석이 더욱 어려운 점도 있다. 어쨌든 새로운 해독이 이루어지면 희미하게나마 역사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비의 내용으로 미루어 대체로 5세기 중·후반경, 즉 장수왕(재위 412~491년)대이거나 문자명왕(재위 491~519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지만 4세기 말에 해당되는 광개토대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어 아직도 설이 분분하다. '석비를 세워 기념할 만한 사건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의문에도 여전히 분명한 답이 없다. 회맹(회합과 맹약)의 어조가 많고 신라를 형제국으로 설명하는 내용으로 보아서 성장하는 신라와의 관계와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뜻이 담긴 것이 아닐까?
흥미로운 설명은 450년에 '바로 한 해 전 고구려 변장이 하슬라(오늘날 강릉 일대)에서 살해된 사건에 대해 신라왕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우의를 다독이는 과정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결국 훗날 신라는 이 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고 한강유역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는다. 신라를 동이(東夷)로 표현하고 왕을 매금(寐錦)으로 칭하는 것이 낮게 보는 표현이어서 신라 사람들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듯싶다.
충주는 고구려가 국원경(國原京)으로 삼고 신라와 백제를 경계하던 남쪽 지역의 거점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가야를 치려고 이 고개를 넘어 군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이후는 비석의 내용도 그러하듯 신라가 6세기 중엽 진흥왕대에 북진정책으로 이 지역을 차지하기까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에 사용된 관아지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비문에 고구려 태자가 신라왕과 신료들에게 의복을 내리는 의례를 했다는 궤영(跪營)이라는 장소가 언급돼 있지만 아직 그러한 유적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비가 서 있는 입석리의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미산성이 치소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삼국의 유구가 중첩되어 나오는 탑평리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와당의 존재는 그만큼 위세적인 건물이 있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탑평리에는 최하층에 백제 주거지들이 있고 고구려층이 그 위를 덮고 있으며 최상층에 신라시대 집자리들이 연속된 것을 미뤄볼 때 오랫동안 도시화한 인구밀집지역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구려 시기의 흔적들이 후대의 신라에 의해 국원경 그리고 나중에 중원경으로 개발되면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마한에서 시작되어 백제 그리고 고구려, 마지막으로 신라의 문화가 겹쳐지는 곳이 이 충주지역이고 그 흔적들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탄금대에 우륵의 전설이 있는 것을 미뤄볼 때 신라가 이곳을 개척할 때 신라인뿐 아니라 가야인도 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고대 국가의 연결고리가 바로 당시 삼한(三韓)의 국제도시였을 충주지역이고 그 중심이 탑평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비에 신라왕을 낮게 보는 구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라는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도 그대로 두었을까? 경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사들을 모두 죽인 사건이나 이 지역을 탈환하려던 고구려 장군 온달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부 고고학자들의 상상대로 중앙탑 부근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마모된 비면을 보면 오랫동안 풍상을 겪으며 서 있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고구려비만이 그 역사를 알지만 입을 열 수가 없으니. 머지않아 관련 유물들이 모두 모일 국립충주박물관에서 새로운 고구려남진사를 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