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원로배우 미아 패로는 까마득한 후배 윌 스미스에 분노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 바로 그 장면, 배우 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폭행 때문이다. 이 같은 초유의 사태에 배우 짐 캐리도 "나 같으면 고소한다" 등 할리우드 배우들은 스미스를 맹비난하고 있다. 미 언론들이 조심스럽게 언급했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박탈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현재 아카데미는 징계를 논의 중으로 스미스의 수상 취소 및 회원 제명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스미스 입장에서 화가 날 수는 있다. 시상자로 나선 록이 자신의 아내인 배우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한 모습에 조롱하듯 농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방송 중 폭행과 욕설은 자신의 말마따나 "선을 넘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오스카 시상식의 위상이 휘청한 순간이었으리라. 실로 오랜만에 성소수자와 장애인, 여성, 비백인에 이르기까지 장벽을 허물며 다양성을 시도했던 아카데미였다. '화이트 오스카'로 불리며 백인들의 잔치로 여겨졌기 때문. 그런데 스미스의 추악한 행동은 이 모든 것을 가려버렸다.
심지어 역사에 남을 감동적인 장면들도 덮어버렸다. 영화 '대부' 50주년 기념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배우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가 한 무대에 서고, 배우 윤여정이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를 수어로 축하하며 시상했던 감동마저 앗아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스미스는 '역대 최악의 오스카'를 만들어냈다. '빌런(악당, 나쁜놈 등)'도 이런 빌런이 없다. 제아무리 역대급 최악의 사태를 꼽아봐도 이보다 더할 순 없을 듯하다.
그야말로 평온하게 진행되던 1974년 제46회 아카데미 시상식. 그런데 일순간 시상식장은 충격과 경악에 빠졌고, 이내 폭소와 박수 세례가 터지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
짙은 녹색의 턱시도를 차려입고 사회자로 나선 배우 데이비드 니븐은 특유의 점잖은 말투로 무리 없이 시상식을 이끌어갔다. 당시만 해도 거친 입담으로 사회적인 비판을 담거나, 선을 넘나드는 애드리브 멘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니븐 역시 불필요한 발언은 삼간 채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서 차분한 진행을 이어갔다. 그는 최우수 작품상 발표를 앞두고 시상자를 소개할 준비를 했다. 카메라가 니븐의 상체를 클로즈업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대 뒤편에서 한 남성이 달려 나왔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는 니븐을 지나 무대를 가로질러 달렸다. 한 손은 '브이(V)'자 모양을 한 채 말이다. 무대에 난입한 사람은 30대 남성 로버트 오펠이었다.
관객들의 놀란 함성에 니븐은 뒤를 돌아봤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다. 하지만 생방송 중에 소스라치게 놀랐을 그 역시 눈을 질끔 감으며 웃고, 어깨를 들썩이거나 귓볼을 만지는 등 어떻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여유롭게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옷을 벗고 자신의 결점을 보여주는 게 인생의 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재미있지 않나요?"
그러자 객석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생방송 중 '최악의 사태'를 고급스럽게 표현하며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니븐은 "저는 계속 진행을 이어가겠습니다"라며 최우수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소개했다. 무대에 나온 테일러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웃어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이런 행동 뒤에 나오는 건 꽤 힘든 일이네요." 관객들은 박수를 보내며 그를 응원했다.
테일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최우수 작품상에 오른 후보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영화 '스팅'에 트로피를 건넸다.
미국인들에게 이날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아카데미 시상식이 운영하는 공식 유튜브 채널의 댓글 대부분은 이렇다. "최악의 사태였지만 최고의 애드리브가 살렸다." "니븐의 멘트는 오스카 역사상 최고의 애드리브."
아, 한 가지 'TMI(Too Much Information)'. 무대에 난입했던 오펠은 5년 뒤 불행한 일을 겪었다. 197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죄송합니다. 실수가 있었어요. '문라이트', 당신들이 최우수 작품상입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올라오세요."
오스카 시상식 역사상 '최악의 실수'는 바로 이 장면이다. 2017년 제89회 시상식.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상 시상에 영화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1967)'의 노배우 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가 무대에 올랐다. 빨간 봉투를 연 비티는 더너웨이에게 발표를 미뤘고, 더너웨이는 지체없이 봉투 속에 적힌 활자를 읊었다. "라라랜드!"
배우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영화 '라라랜드'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당시 오스카 시상식의 최고 기대작으로 꼽힌 작품 중 하나다. 작품상 시상 전 이미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분장상, 음악상, 주제가상 등을 휩쓸었다.
여기에 작품상까지 호명되자, '라라랜드'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등은 일제히 무대에 올라 환호성을 지르며 트로피를 손에 들었다. 감동적인 수상 소감까지 전했고, 스톤은 눈시울까지 붉혔다. 화면에는 '작품상 라라랜드'라는 자막도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의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갑자기 주최 측 관계자들이 무대에 올라와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일순간 '라라랜드'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배우 스톤이 "오 마이 갓"이라며 놀라 말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순간 '라라랜드'의 프로듀서 조단 호로위츠가 수상 소감을 멈추게 하더니 영화 '문라이트'가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밝혔다. 이날 사회자였던 지미 키멜이 나와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 역시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러자 호로위츠는 빨간 봉투를 넘겨 받아 '문라이트'라고 적힌 카드를 들어 보였다.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해 다시 박수를 보냈다.
'라라랜드' 팀은 뒤늦게 무대에 오른 '문라이트' 팀에 들고 있던 트로피를 건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할리우드 스타들조차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무대 바로 밑에 있던 흑인 배우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주연배우 타라지 P. 헨슨은 휴대폰으로 당시 상황을 동영상에 담으며 기막혀 했다. 배우 사무엘 L. 잭슨도 당시 상황을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우여곡절 끝에 트로피가 제 주인을 찾아갔지만 이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안타까운 것은 모처럼 흑인 감독과 주연배우가 만든 영화에 작품상이 돌아갔지만 예기치 못한 실수로 의미가 반감됐다는 점이다.
'최악의 실수'가 나온 건 처음부터 잘못 전해진 빨간 봉투 때문이다. 시상식 관계자는 비티에게 여우주연상 수상자('라라랜드'의 엠마 스톤)가 적힌 봉투를 전달한 것. 이후 비티는 "봉투를 열었더니 엠마 스톤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고 해명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 하나. 1년 뒤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도 진행을 맡은 카멜은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사과부터 했다. 전년도 작품상 호명 실수에 대한 사과였다. 그는 "꼭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혹시 오늘 이름이 불리면 바로 일어나지 마시고 1분 정도 기다렸다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눙을 쳤다.
이렇게 허무할 수 있을까. 시상자도 관객도 시청자도 주최 측도 모두 허탈할 뿐. 수상자는 불참했고 대리 수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빠른 마무리가 답이었다.
지난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으로 최초의 한국인 수상자가 되어서다. 1년 전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주요 본상(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쓸었던 감동이 이어진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윤여정을 제외하면 시상식 자체는 맥이 빠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행사 자체가 2월에서 4월로 연기된 데다가 축소돼 김이 좀 빠지긴 했다. 이를 의식한 건지 당시 시상식 연출을 맡은 영화 '트래픽'의 스티브 소더버그 감독과 그래미상을 연출한 제시 콜린스,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제작한 스테이시 셰어는 막바지 시상 순서를 바꾸는 '파격'을 감행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마무리를 작품상이 아닌 남우주연상 시상으로 변경했다. 뜬금없는 조치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는 영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배우 채드윅 보스만에게 쏠려 있었다. 2020년 대장암으로 타계한 그의 명연기는 영화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고, 골든글로브를 비롯해 미국배우조합상(SAG), 크리틱스초이스 등 미국 주요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어 유력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예측됐다.
그래서였을까. 소더버그 감독 등 시상식 연출자들은 남우주연상을 이례적으로 맨 마지막 순서에 배치했다. 고인에게 트로피를 안겨주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추모의 분위기는 물론 감동까지 전할 '고도의 작전'을 모색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디 미래의 일이 계획대로 되던가. 영화 '조커'로 전년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은 마지막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정작 그의 봉투 안에는 보스만이 아닌 영화 '더 파더'의 80대 노배우 앤서니 홉킨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홉킨스. 문제는 수상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리 수상자나 그 흔한 화상 연결도 준비되지 않았다.
덩그러니 수상자를 호명한 피닉스의 목소리만 남았을 뿐이다. 주최 측도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시상식은 그렇게 부랴부랴 끝나버렸다. 90년 역사상 가장 허무하면서도 허탈한 순간이었다.
역대 오스카 배우 중 최고령 수상자가 된 홉킨스는 사실 영화 '양들의 침묵(1991)' 이후 29년 만의 경사였다. 그의 생애 두 번째 남우주연상이었다. 시상식 이후 홉킨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상 소감 영상을 올려 "83세에 이 상을 받을 줄 전혀 몰랐다"며 "우리에게서 너무 일찍 떠나버린 보스만에게도 추모를 표한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그는 자신의 수상을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시상식 당일 고향인 영국 웨일스에서 자고 있었다니. 그래서 언론과 평단은 말한다. 세상 허무한 엔딩이었지만 아카데미의 투명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사건'에 버금가는 '깜짝쇼'도 있었다. 2015년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그 무대다. 당시 시상식의 주인공은 영화 '버드맨'이었다.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4관왕을 차지했으니까.
'버드맨'의 인기는 시상식의 사회자까지 변화시켰다. 당시 시상식 사회자는 아역배우 출신 닐 패트릭 해리스. 그는 영화와 방송뿐만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휘젓는 전천후 배우로 유명하다.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로 낙점됐을 때는 SNS에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이뤘다며 무척 좋아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스카 역사상 역대급 깜짝쇼를 펼친 사회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가 선보인 무대는 바로 '팬티쇼'다. 기술상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해리스는 관객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말 그대로 팬티 차림에 양말과 구두만 신고 무대에 올라서다.
해리스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 한가운데 섰다. 그는 "연기는 아주 숭고한 직업"이라는 '버드맨' 속 대사를 읊더니, 다음 차례 시상자인 배우 마고 로비를 소개한 뒤 사라졌다. 느닷없는 '맨몸' 공격에 깜짝 놀란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폭소를 터트리며 박수를 보냈다.
해리스가 선보인 충격적인 모습도 '버드맨' 패러디였다. 영화 속에서 할리우드 톱스타였다가 추락한 뒤 브로드웨이 무대로 재기하려는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처했던 상황을 연기한 것. 팬티 차림의 장면은 마이클 키튼이 영화관 문에 낀 가운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길을 나선 모습이었다.
이 짧은 순간 해리스는 또 다른 모습도 보였다. 시청자들이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도 패러디했다. 그는 무대 위로 나오기 전에 드럼을 치고 있던 위플래쉬의 배우 마일스 텔러에서 "내 템포랑 안 맞아"라고 말했다. 영화 속 음악학교의 플레처(J.K. 시몬스) 교수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대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을 거다. 팬티 차림의 비주얼이 너무도 강렬해서다. 시상식의 관객들과 전 세계 시청자들은 '혹시 방송 사고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윌 스미스의 생방송 폭행이나 알몸 사건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