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영 기자의 '계집애 같은 말투', 꼭 고쳐야 할까

입력
2022.04.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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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어린 여자의 공적 말하기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 '인턴 기자'를 표방하며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20대 여성의 말투를 희화화하며 화제를 모았던 SNL 코리아의 '주기자(주현영)' 하이라이트 클립을 봤다. '주기자'는 공적 발화를 주된 일로 삼는 '기자'라는 직업에 아직 적응 못한 인물로, 날 선 앵커의 비판에 '유리 멘탈'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마는 심약한 '초짜'다. 바짝 긴장한 '주기자'의 떨리는 목소리와 자꾸만 천장을 향하는 눈동자,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단어의 끝을 올려 질문하는 듯한 말투는, "모든 여자들이 '주기자' 같지는 않다"는 반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20대 여성들에서 흔히 관측되는 특징처럼 보인다.

이처럼 20대 여성들의 일부인 '주기자'가 자기 생각을 똑바로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감정을 숨기는 데에 유능하지도 않으며, 결국 '못 하겠다'며 눈물을 훔치며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이유는 명백하다. 바로 '앵커(안영미)'가 고작 인턴인 '주기자'에게 제대로 된 급여도 대우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 이상의 일을 해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기자'를 '마음 약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가혹한 조건들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그녀에게만 사태의 책임을 지우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기자'는 단순히 20대 여성의 미숙함을 재생산하는 캐리커처일 뿐만 아니라 어리고 약하고 '초짜'인 우리 대부분의 심적 풍경을 대변하는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귀여운 척하지 마세요" 남자 교수의 지적

'주기자'의 실패하는 공적 발화를 보며 떠오른 것은 20대 초반 대학에 다니며 경험했던 몇몇 장면들이다. 나는 미술 대학에 입학했고 생전 처음으로 '크리틱(Critic)'을 하게 됐다. 크리틱이란 수업 내에서 이뤄지는 심사·평가 과정으로, 보통 교수의 지도 아래 각자의 작품을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판적인 의견을 주고 받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크리틱에서 보여 주는 작가의 공적 말하기는 정량적·객관적 지표가 부재한 미술 대학에서 유효한 평가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자기가 왜 이런 작업을 하고자 했고 작업 과정에서는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작가가 공적 말하기에서 보여 주는 태도는 그가 얼마나 '작가다운' 책임감으로 작품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서다.

그러나 무엇이 '작가다운' 것이고 무엇이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인가. 대부분의 어리고 어설픈 미대생들은 교수가 설정한 기준에 미달할 것이고 그래서 종종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상처를 받았다는 애들은 항상 소문처럼 들려 왔다. 크리틱을 하던 도중에 어떤 교수가 어떤 애에게 심한 말을 했다거나 그래서 그 애가 울었다거나 하는 뻔한 소문 말이다. 인기 있었던 한 남자 교수는 열에 아홉이 여자애들로 구성되어 있던 어느 수업의 크리틱에서, 발표 중인 여자애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여운 척하지 마세요. 하나도 안 귀엽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여자애가 크리틱의 끊어질 듯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투항하듯, 용서를 구하듯 귀여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교수가 지적한 것은 그 여자애의 말투였다고 한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부사를 남발하는, 종결 어미를 사용할 줄 모르는, 공적 발화와 사적 발화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자신감이 없고, 부끄러움을 타고, 어리광을 부리는, '귀여운 척'하는 그 여자애의 말투.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수업을 듣고 있는 다른 모든 여자애들에게 본보기라도 보이듯 모욕줘야만 했던 바로 그 말투.

교정의 대상인 여자애들의 말투


학교에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그들의 말투가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치심을 강요당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직 여자애들의 미숙한, '귀여운 척'하는 말투만이 공적 발화로서의 자격 검증에 부쳐질 뿐만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참을성이 없는 것은 주로 남자 교수들이었다. 어느 남자 교수는 여자애들에게 크리틱 시간에라도 '다나까'로 문장을 끝맺어 줄 수 없겠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 다른 어느 남자 교수는 발표하는 여자애들에게 '프로답게' 굴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프로답게' 구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발표를 하는 도중에 질질 짜지 말 것. 스테이트먼트(작가가 스스로 작품에 대해 설명한 글)를 '일기장'처럼 쓰지 말 것. 공과 사를 분리할 것. 한마디로, '계집애처럼 굴지 말 것'.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지긋지긋한 소문처럼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미술 대학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 교수들이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세상 사람들이 이를 진지한 문제로 여길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소문은 그들의 명성과 평판과 지위에 아무런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단순한 내부 정보 전달에 불과했으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소문들을 전달하며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교수가 귀여운 척하는 말투를 지적했대. 그러니까 너도 그 교수 앞에서 그런 식으로, '계집애 같이' 굴지 않도록 조심해. 그 애처럼 눈 밖에 날지도 몰라.'

내면화된 무능력함에 대한 혐오

나는 그런 소문들에 정의롭게 분노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내게는 내 문제가 있었고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의 문제가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나는 내가 크리틱에서 하는 말들이 정확하고 예리해 보이길 바랐고, 숨길 수 없는 사투리로 인해 촌스러워 보이지 않기를 바랐고, 모두에게 의미있는 사안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랐다. 나는 그때도 머리가 짧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레즈비언-부치(여성 간 동성애 관계에서 '남성적'인 스타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내 문제는 내부에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규범 바깥에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규범 안으로 들어가길 절실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그녀들의 문제, 즉 '귀여운 척하는 말투'는 한편으로는 배운 남자들의 성차별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들의 무능력에 귀속된 문제였다. 전자는 뻔한 일이었다. 여자애들이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그 남자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잡기는 힘든 일이다. 후자의 경우는 본인의 의지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전자의 몫까지 비난받기 쉽다.

다시 말해 자기 주관을 성숙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들의 무능력은 성차별보다 쉽게 개선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보다 개인의 노력과 성취가 더 효율적이라는 이 같은 관점은, '귀여운 척'한다는 비난을 여성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 내면화된 여성 혐오의 일종임을 은폐하기 쉽다. 여성 혐오는 언제나, 무능력하고 약하고 어린 것들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들에게 거리를 두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최소한 나는 울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들하고는 다르니까.

울고 나서 알게 된 것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서양사를 가르치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은 흔한 학부 교양 수업처럼 수강생들과 함께 조를 짜서 관심 주제를 함께 조사하고 발표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고른 발표 주제는 '영화 속에서 나타난 동성애 차별의 역사'였다. 수강생은 30명 남짓이었고 나는 그들 앞에서 말하게 될 일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발표의 막바지에 이르러 한 남학생이 적극적으로 제기한, '동성애는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 앞에서 나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발표 내용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에게 화를 내다 눈물이 터진 것이다.

그 장면 속에서 혼자서 화내고 울고 말을 더듬는 내가 보인다. 나는 부끄럽고 화가 난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가장 개인적인 얼굴을 보인 것이 부끄럽고, 또한 내게 분명한 적의를 품고 '동성애 찬반 운운'했던 그 남학생의 논리적인 척하는 뻔뻔한 얼굴에 화가 치민다. 그도 다른 남자 교수들처럼, 그리고 나처럼 약하고 어리고 무능력한 것들을 혐오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앞에서 나는 '귀여운 척'하는 말투를 쓰는 여자애들과 똑같아 보인다. 나는 공과 사를 구분 못 하고 흥분해 발표를 하다 우는 약해 빠진 '계집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계집애'는 동시에, 진지한 얼굴로 공적 말하기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준엄하게 경고하는 '어른' 남자들의 앞에서 더 약하고 작은 소리로 '징징'거릴 자신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공적 말하기가 아닌, 어리고 약하고 못난 여자들의 공적 말하기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연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