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새 정권 출범에 맞춰 '용산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청와대가 윤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을 "면밀히" 살펴보고 협조하겠다는 사실상의 '단서'를 단 데 따른 것이다.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청와대 만찬 회동 직후엔 '문 대통령의 예산 협조 약속'이 최대 성과로 꼽혔지만, 하루 만에 분위기가 식었다. 소상공인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 손실보상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안 편성을 비롯한 다른 쟁점도 불씨로 남았다.
28일 청와대 회동 이후 집무실 용산 이전은 큰 산을 넘은 듯했다.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이 전한 문 대통령의 발언은 "집무실 이전 지역에 대한 판단은 차기 정부의 몫이다. 현 정부가 이전 계획에 따른 예산을 면밀히 살펴 협조하겠다"였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29일 오전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이 협조 의사를 피력해 주신 것으로 파악했다"며 '협조'에 방점을 찍었다.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문 대통령의 뜻은 온도 차가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 발언은 '면밀히 살핀다'는 데 방점이 있다"고 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는 윤 당선인의 의지는 존중하지만, 현직 대통령으로서 안보 공백과 예산 계획의 현실성 등을 꼼꼼히 따지겠다는 얘기다.
정부 관계자는 예비비 편성에 대해서도 “윤 당선인 측이 마련하는 이전 계획과 예산을 검토한 후에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집무실 이전을 위해 윤 당선인이 요구한 예비비 496억 원의 편성안이 국무회의를 언제 통과할지도 불투명해졌다.
윤 당선인 측도 기대를 상당 부분 접었다.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 관계자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안보 공백은 당연히 없고, 예산도 행정안전부, 경호처, 국방부, 기획재정부가 다 검토한 것"이라면서도 "국무회의에서 예비비를 승인해줘야 뭔가 달라질 텐데, 상황이 바뀐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의 '선제적 협조'가 불발되면서 윤 당선인 측은 대통령 취임일(5월 10일)에 용산으로 출근하겠다는 계획을 밀어붙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제원 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세밀한 레이아웃, 예산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청와대가 요구하는 '이전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집무실 이전이 취임일을 넘기느냐'라는 질문에도 장 비서실장은 "예측할 수 없다"며 "지금 좀 늦어진 측면이 있다"고 했다. 윤 당선인 측이 설정했던 '5월 10일 용산 입주를 위한 예비비 승인 시한(지난 25일)'이 이미 지난 만큼, 예비비 편성을 무리하게 요구해 굳이 청와대와 정면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윤 당선인이 취임 후 한동안 서울 통의동 집무실을 쓸 가능성도 커졌다.
추경 역시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28일 회동에서 추경 편성 필요성에만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공감대를 형성했을 뿐 절차나 규모, 시점 등 세부 사항은 실무 협의로 미룬 상태다. 장 비서실장은 "(회동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은 안 됐다"고 했고, 청와대 관계자 역시 "추경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세부적인 것은 실무적 협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측은 실무 협의 창구로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과 장제원 비서실장을 지정했다.
핵심 관건은 재원 마련 방안이다. 윤 당선인 측은 '한국판 뉴딜' 등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사업 예산을 깎는 대규모 지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여권에선 국채 발행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신용현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은 "일단은 지출 구조조정이 우선"이라고 한 반면,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추가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추경 시기도 쟁점이다. 인수위는 '최대한 빨리'를 주장하지만, 여권에선 현실적으로 다음 정권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는 기류가 강하다. 장 비서실장은 "집권하기 전에 (추경 편성을) 할 수 있는지는 이철희 수석과 얘기해 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