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제작자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탔고, 흑인 배우는 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환호로 가득 찬 시상식에서 소리 없이 감동을 준 청각장애인 배우들은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성소수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은 약자와 소수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백인 중심 오스카'(#Oscars So White)라 불리며 인종 편향적이란 비판을 거세게 받아온 것과 180도 달라진 행보였다. 오스카가 2020년 작품상 수상 자격에 다양성 기준을 추가한다고 밝힌 뒤에 이뤄진 변화다.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오스카는 다양성의 축제였다.
션 헤이더 감독은 '코다'로 이날 작품상을 받았다. 90여 년의 오스카 역사에서 여성 감독이 작품상을 받기는 2008년 캐스린 비글로( '허트 로커'), 2021년 클로이 자오('노매드랜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또 다른 여성 감독인 제인 캠피온은 넷플릭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로 이날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 제작자다. 1990년 '내 책상 위의 천사'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특별심사위원상을,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각각 받았다. 캠피온은 작품에서 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파워 오브 도그'에선 '마초'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서부극에 퀴어적 요소를 결합했고, '피아노'에선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윌 스미스는 이날 생애 첫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킹 리차드'에서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 자매를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길러낸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를 원숙하게 연기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덴젤 워싱턴 등에 이어 역대 다섯 번째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이다. 그는 올해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된 자서전 '윌'의 부제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단 하나의 힘'으로 달았다. 1990년 NBC 시트콤 '더 프레시 프린스 오브 벨 에어'로 데뷔한 그가 30여 년 동안 꾸준히 연기하며 '백인들의 잔치'(오스카)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을 이룬 셈이다. 이날 장편 다큐멘터리상의 영예는 흑인 커뮤니티를 다룬 음악 다큐 '축제의 여름'에 돌아갔다.
오스카는 장애인 배우의 '당사자성'도 집중 조명했다. 시상식의 남우조연상은 '코다'에서 루비의 아빠 프랭크를 연기한 트로이 코처에게 돌아갔다. 청각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한 농인 배우의 오스카 수상은 1986년 '작은 신의 아이들'의 말리 매틀린 이후 코처가 두 번째다. 무대에 선 코처는 수어로 "모든 장애인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말했다. 그의 상의 왼쪽엔 '사랑해요'란 뜻의 수어를 표현한 손가락 모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오스카는 성소수자에게도 빗장을 열었다.
공개적으로 성정체성을 "퀴어"라고 밝힌 라틴계 배우 아리아나 드보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오스카에서 여성 성소수자 배우가 트로피를 품에 안기는 이례적이다. 이날 시상식은 '무지갯빛'이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동성 연인과 나란히 앉아 시상식을 즐겼고, 성전환수술을 한 엘리엇 페이지는 나비 넥타이를 한 채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보수적인 오스카에 다양성이란 화두가 중심부로 파고들었다는 걸 보여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