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불 그리고 혼.
한구석에 가마가 놓인 11평 남짓(37.75㎡)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흙을 빚어 혼을 불어넣고자 했던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삶을 요약하면 이 세 단어로 충분하지 않을까. 기어이 혼을 다한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삶을 끝내고 만다.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그의 이름 석 자에 '비운의 천재 조각가'라는 수식이 들러붙는 연유다.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이 열고 있는 대규모 회고전 '노실의 천사'는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비운의 굴레에서 권진규를 끄집어내 다시 현재를 살게 한다. 지난 24일 전시 개막식에 앞서 만난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는 "'비운'의 라벨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형용"이라고 일갈했다. 권진규의 마지막 순간을 목도한 허 대표는 최근 외삼촌의 삶을 갈무리한 평전 '권진규'를 써냈다.
5월 22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 제목의 '노실'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화로 로(爐)'와 '방 실(室)'이 합쳐진 조어로, 가마가 있는 아틀리에를 뜻한다. 즉 권진규의 아틀리에다. 권진규가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전시를 기획한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권진규는 흔히 리얼리즘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 영원성이었다"고 짚었다.
전시는 권진규의 생전, 사후를 통틀어 최대 규모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1950~1970년대 조각 137점과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73점을 선보인다.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이 '권진규 컬렉션'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대거 기증했기에 가능했다. 허 대표는 "권진규는 유족의 것이 아니"라며 "'내 작품 갖고 팔아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한 게 아닌 만큼 기증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이 중 60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특히 권진규 작품 세계의 문을 여는 1950년대 주요 작품이 눈에 띈다.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권진규가 졸업 후 일본 최고의 재야 공모전인 니카전에서 특대의 상을 받은 '기사', '마두A', '마두B' 등 석조 3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마두A'를 제외한 나머지 두 점은 권진규의 누이이자 허 대표의 어머니인 권경숙이 반세기 만에 직접 일본에서 찾아온 것이다. 허 대표는 "당시 무사시노미술학교 이사장이 삼촌의 작품을 사줬고, 그의 작고 후 딸이 갖고 있던 것"이라며 "어머니가 여러 해 수소문한 끝에 직접 일본에 건너가 양도받았다"고 했다.
권진규가 1960년대 왕성하게 작업한 부조 작품도 다수 걸렸다. 한 학예사는 "(전 생애에 걸쳐 환조 작업을 주로 했기에) 이번엔 부조를 보여드리려고 애썼다"며 "부조의 경우 뭘 표현했는지 어디에서 모티브를 따왔는지 알려진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권진규에 대한 학술 연구가 더 필요한 이유다. 추상을 선호하던 당시 화단의 몰이해와 냉대가 권진규를 나락에 떨어뜨렸다는 세간의 인식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한 학예사는 "권진규는 한번도 유명하지 않았던 적 없는 작가"라며 "다만 대중의 무관심으로 작품이 팔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을 뿐"이라고 했다.
'권진규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서울시립미술관은 권진규 전시와 연구의 본산이 됐다. 내년에는 시립미술관 분관인 남서울미술관에 권진규 상설전시장이 문을 연다. 허 대표는 "서울시가 지난달 세계 5대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선언했는데 그러자면 문화도시의 얼굴인 시립미술관을 세계 5대 미술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말로만 할 게 아니라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