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로운 격리생활

입력
2022.03.25 22:00
23면

결국, 비껴가지 못했다. 나도 확진자가 됐다. 일일 확진자가 35만 명을 넘나들 때였다. 당시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던 아들이 확진을 받아 집에 와 있었다. 남편이 차를 갖고 가서 데리고 와 아들은 3층에서, 우리는 2층에서 생활했다. 아들과 나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처음엔 목이 따끔거렸다. 자가 키트 결과는 음성이었다. 이튿날 증세가 심해져 면봉을 더 깊숙이 찔러 검사했다. 여전히 음성이었다. 타이레놀을 먹고 PCR 검사를 받으러 갔다. 보건소에서도 자가 검사를 했을 때는 줄 하나가 희미했다. 그러나 다음 날 결과는 양성이었다.

남편은 내가 확진 판정을 받은 즉시 PCR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음성이었다. 책방은 남편이 지키고, 나는 3층으로 컴퓨터를 갖고 올라갔다. 아들은 내가 확진을 받은 날 격리가 끝나 서울 자기 방으로 돌아간 터였다.

격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밥을 해 먹어야 하니 주방이 있는 2층을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소독제를 갖고 다니면서 움직이는 곳마다 뿌려댔다. 다행히 인후통만 심할 뿐 몸살이나 열은 동반하지 않았다. 독서 모임과 수업, 회의는 모두 줌으로 했다. 7명이 줌 회의를 할 때는 7명 중 3명이 확진자였고, 수업을 듣는 한 친구는 5인 가족 중 4명이 확진이라고 했다. 확진자 수가 최고 6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골책방이라 사실 평소에 손님이 거의 없다. 그래도 가끔 손님이 한둘 왔었는데 내가 격리하는 동안 마지막 날 하루를 빼고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봄이라 날씨는 햇빛이 따스했다. 손님 없는 책방을 지키고 있던 남편이 하루는 조각 널판에 오일스테인을 발라 테이블 하나를 만들었다. 3층에서 책을 읽던 나도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손님도 없고, 야외가 아닌가. 특히나 봄에는 책방보다 마당이 더 궁금한 계절.

나는 뛰쳐나가 목장갑을 끼고 전지가위를 들었다. 겨울 정원을 빛내주던 수국 꽃을 잘랐다. 꽃이 지고 나서 잘라야 이듬해 더 풍성한 꽃을 본다고는 하는데, 나는 정원이 쓸쓸한 겨울을 위해 남겨뒀던 터였다. 그리고 화단 사이 검불을 긁어냈다. 세이지 뿌리가 있는 곳에서는 단내가 났다. 3월이어도 오래 밖에서 일하다 보니 등에서 땀이 났다.

하루는 냉이를 캐서 묵은김치를 송송 썰어넣고 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아직 두꺼운 얼음장 아래로 쏟아지는 계곡 가에 쭈그리고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격리 기간이 끝났다. 방 한 칸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이들에 비하면 호사로운 격리였다.

격리 마지막 날 저녁, 자축 의미로 맥주 한 캔을 땄다.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탄성을 내질렀다. 대단한 애주가는 아니지만 입안으로 달착지근한 맛이 착 감겼다. 흔하디흔한, 그래서 싱겁다 어떻다 말 많은 우리나라 맥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골로 들어올 때 사람들이 걱정했다. 나이 들면 병원 가까이서 살아야 한다고. 인적 없는 숲속에 책방을 차렸을 때 사람들이 염려했다. 누가 온다고. 그들의 걱정과 염려를 존중했지만,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동안 살아온 삶도 안갯속 같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호사로운 격리생활을 마치고 다시 책방으로 내려왔다.



임후남 읽고 쓰는 사람·생각을담는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