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들과 언제 어른이 됐다고 느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친구는 자기 이름으로 된 보험에 스스로 가입했을 때라고 말했다. 내게 닥칠지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한 방책을 부모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마련한 순간, 어른이 됐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나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았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단순히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증을 얻게 돼서만은 아니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나의 외국행을 반대하셨는데, 그와 상관없이 나의 의사로 결정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기로 한 그 순간의 책임감이 내게는 어른이라는 단어와 무게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떠올린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보호자로서 부모의 존재가 희미해진 순간이라는 점이다. 부모의 보호와 그늘이 사라졌다고, 혹은 거기서 벗어났다고 느낀 순간이라면 법적 성인이 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모가 아닌 내 선택이 나의 인생을 결정한 순간, 부모의 의견이나 결정에 반대한 순간, 혼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부모가 알지 못하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을 만들기 시작한 순간들. 부모의 바람과 기대 뒤편에서, 그들은 절대 볼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들키지 않는 상상을 하며 보낸 시간이 모여 우리는 어른이 된다. 이 시기를 청소년기, 혹은 십대 시절이라고 하며, 그 사이 유난히 비밀이 많아지며 감정의 변화가 요동치는 때를 특정해 사춘기라고 부른다. 날씨로 보면 꼭 이맘때 같다. 맑은가 하면 흐리고, 3월인데도 갑자기 눈이 내리기도 하고, 따뜻해졌나 싶을 때 꽃샘추위가 찾아오기도 하는 변덕의 시절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메이도 그 시절을 지나고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메이는 갓 중학생이 된 열세 살 소녀로, 중국계 캐나다인이다. 메이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메이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효(孝)나 예(禮) 같은 가치에 헌신하느라 자기 자신을 잃을 일이 없는 공식적인 성인이다. 토론토 내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열세 살부터 성인 요금을 내야 해서 그렇다. 학교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학업과 교내 활동에 집중하고, 하교한 뒤에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사원의 일까지 돕는 모범생 메이에게 사춘기 같은 건 찾아오지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을까? 스스로 다 컸다고, 나는 이미 어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메이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증거다. 메이에게, 엄마는 알지 못하는 세계와 감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메이의 사춘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는 모르는 메이의 세계에는 친구들과 남자 아이돌 그룹 '4타운'이 살고 있으며, 한중간에 자리한 여드름을 닮은 활화산에서는 타인을 향한 성애적 호기심과 욕망이 막 분출되기 직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참이다. 그리고 엉뚱하지만,레서판다도 있다.
레서판다가 여기서 왜 나오느냐면, 붉은빛의 털과 길고 풍성한 꼬리를 가진 이 동물이 바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 스타일로 서술해보면 이렇다. 메이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 귀엽고 커다란 레서판다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한차례 소동을 겪은 후, 메이는 이 변신 능력이 가족 사원에서 모시고 있는 조상신으로부터 모계로 이어져 온 축복 혹은 저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정 그래프가 요동치면 레서판다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되도록 침착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판다를 봉인하는 의식을 치르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고, 온갖 것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아무 때나 눈물이 나기도 하는 사춘기 소녀에게 기다림이 가능한 미션일까? 커다랗고 냄새나는 털투성이 괴물로만 보였던 레서판다에게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인간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찾아내 준 친구들 덕분에, 메이는 엄마와 외할머니, 이모할머니들은 해본 적 없는 모험을 시도하기로 한다. 레서판다를, 비밀을 나만의 세계에서 꺼내 모두의 세계에 풀어놓기로 한 것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사춘기의 은유인 레서판다를 가운데에 두고 엄마와 딸의 관계,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 부모 세대의 기대와 자식 세대의 반항과 같은 소재를 모두 엮어낸다. 이 작품은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엄마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는 모든 딸에 대한 이야기면서, 가족 바깥에서 사랑하고 믿어주는 존재를 만나 그 관계에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의 세계를 넓혀 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함께 변해가는 시기에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찾아가는 십대의 이야기이며, 앞선 세대의 유산을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물려받고 내 삶에 적용해 나가는 새로운 세대의 서사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가 사랑스럽고 깜찍하며 종종 지나치게 귀여워서 울망울망한 표정을 짓게 되고 마는 화면 속에, 100분짜리 애니메이션에 모두 담겨 있다. 그렇지만 '인사이드 아웃' 이후 최고의 픽사 영화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메이처럼 얼굴에 점이 많고 눈썹이 드문드문 난 아시안 여성으로서, 메이의 엄마 밍처럼 엄하거나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딸에게 거는 기대만큼은 숨기지 않았던 엄마를 자주 실망시켜 온 딸로서, 메이와 비슷한 나이 때부터 쭉 여러 색의 풍선을 흔들어 왔고 여전히 나만의 스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팬으로서, 무엇보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해주는 친구들을 통해 여전히 세계를 넓혀 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있는 그대로 최고의 픽사 영화다.
최고의 픽사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스카이돔이 주 무대가 되는 하이라이트 장면의 스펙터클을 생각하면 더욱 아쉽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국내 극장 개봉 없이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바로 공개됐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봐야 하는지, 극장이 축소되고 있다고 봐야 하는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단 OTT 공개의 좋은 점이 있다면, 화제작인 경우 제작기나 부가 영상을 함께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영화 역시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판다를 안아줘!'가 함께 공개됐다. 이 다큐멘터리가 소개하는 도미 시 감독과 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보면, 이 영화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작품이 될 수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도미 시 감독은 1989년 중국에서 태어났고, 이후 캐나다로 이주해 토론토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감독이 열세 살이었던 2002년의 토론토가 영화의 배경인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만든 팀의 주요 리더가 모두 여자였다는 것, 이들의 인종과 성 지향, 혼인과 출산 여부가 각기 달랐다는 정보 또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그리는 여성 중심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어 제목이 원제인 '터닝 레드'보다 직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계속 곱씹어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메이에게, 그리고 사춘기 시절의 모두와 인간의 성장에 비밀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본격적으로 비밀이 생기는 시기가 사춘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밀을 누구와 공유하는지가 관계의 변화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처음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던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부모가, 어른들이 몰랐으면 하는 비밀을 품기 시작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비밀을 나눌 사람을 내가 골랐을 때부터다. 그때 바로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떤 비밀은 나 혼자만의 것임을, 나눌 수도 없음을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순간이 찾아오면 외로워질 수 있기에, 메이와 친구들에게는 그날이 천천히 오면 좋겠다. 메이의 엄마 밍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보면 그 순간을 이야기 속에서 만나볼 수도 있다. 그러니 올해 봄, 남녀노소 모두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보며 봄날처럼 변덕스러운 사춘기의 매력을 느끼길 권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입과 구독이 필요하지만 어디서든 틀면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단은 OTT의 장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