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광화문에 갔다 백신 접종 반대 시위를 목격했다. 확진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중에도 백신에 대한 공포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의사와 과학자의 설명으로는 백신에 대한 불신을 해결할 수 없다. 미국에서도 백신 반대 시위가 계속된다. 백신뿐인가. 미국인의 약 30%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설명을 부정한다. 진화론에 동의하는 미국 성인은 약 54%인데, 놀랍게도 이 수치는 최근 10년 사이에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왜 이런 것일까?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지은이인 역사학자 호프스태터는 19~20세기에 걸쳐 미국 반지성주의의 흐름을 살핀다. 그가 주목하는 역사적 결절점은 1950년대 매카시즘과 대통령 선거다. 매카시와 그의 추종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제공해 온 모든 혜택- 제일 좋은 집, 최고의 대학 교육, 정부 내의 좋은 일자리-을 누린 사람들"이 나라를 팔아넘겼다고 주장하며 '빨갱이'를 색출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공론장에서 축출당했다. 대통령 선거 역시 똑똑한 스티븐슨 대신 군인 출신의 아이젠하워를 선택했다. 지식인은 "우쭐대고, 젠 체하며, 나약하고, 속물적이며, 부도덕하고, 위험하며, 사회의 파괴분자일 공산이 크다"(41쪽)고 여겨졌다. 호프스태터는 이와 같은 지식인에 대한 반감과 지성에 대한 불신을 '반지성주의'라고 진단한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종교적 믿음에 실용주의적 자기계발 풍조가 맞물려 등장했다. 기독교 부흥주의가 인기를 끌면서 근대성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자 지식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애국심도 없는 자들로 호명됐다. 20세기 초반 지식인의 다수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기대어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미국은 충분히 지적이지 못하다는 지식인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미국 지식인은 조국을 사랑하지도 이해하지도 않고 또 어느 사이엔가 무책임하고 오만해졌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비판"(309쪽)이다. 문화적인 유럽 대 세속적인 미국이라는 대결 구도는 무너졌으며, 지식인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여기에 실용주의가 더해진다. 과거 미국은 유럽에 비해 짧은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는 열등감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교육을 강조하고 교양 교육을 실천해 왔다. 그러나 유럽의 문화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에 패배했다. 대학 교육을 "귀중한 몇 년을 무의미한 과거로부터 교양을 얻는 데 허비"해 왔다고 평가하는 데일 카네기처럼, 실용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대학 교육의 목적을 직업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으로 환원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담하고 남성적인 실용주의를 대변하고, 귀족적이고 여성적이며 세속을 벗어난(이상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반지성주의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반지성주의는 성차별주의로 이어졌다.
1964년 출간된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미국을 반지성주의로 진단한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한국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더 이상 "야만이 지배하는 특이한 땅"이 아니라는 자기 인식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장면은 이제 막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의 발전상을 떠올리게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종교인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 어느 때보다 무속신앙과 풍수지리에 대한 이야기로 공론장이 뜨겁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계발 중심의 실용주의는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의제가 됐다. 인구 급감으로 위기에 처한 지방대학들은 철학과처럼 순수학문을 다루는 학과들을 통폐합하는 중이고, 여성가족부 폐지가 대선 공약의 이슈가 됐다. 지방분권이나 적극적 차별철폐조치는 비실용적이고 쓸모없고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상황이니 반지성주의라는 호프스태터의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 지식인들의 성찰과 행동을 촉구하며 기대를 내비쳤다. 본격화되는 반지성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문제는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