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은 어느 대선보다 치열했지만 노동의제가 사라진 대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선 후보들의 노동 홀대는 심각했다. TV토론이 5차례나 열렸지만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 간 노동이사제 찬반논쟁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눈감고 뒷짐 지고 있기에는 노동시장의 현실이 녹록지 않다. 극심해진 일자리 양극화, 근로기준법으로 규율되지 않는 플랫폼 노동 확산, 표면화된 세대 간 일자리 경쟁까지 어느 한 가지 노동과 무관한 사안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은 무엇일까. “한 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손발로 노동하는 것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처럼 단편적으로 드러난 노동관이 희화화된 정도다. 그러나 공약집을 살펴보면 출범 40여 일을 앞둔 윤석열 정부가 힘주어 추진할 노동분야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근로시간 유연화와 연공급 중심 임금체계의 직무ㆍ성과형 임금체계로의 개편이 핵심이다. 전자는 노동의 유연화라는 보수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후자는 보수정당의 새로운 정치적 기반으로 떠오른 ‘MZ세대’에 소구력이 큰 공약이다. 장시간 노동 혁파가 여전히 한국사회의 과제라는 점에서 전자는 논란이 있지만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 연공급 체계의 지속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에는 적지 않은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모두 20년 가까이 정부와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서로 논박해 왔던 과제들이다.
보수정권인 만큼 보수적 방법으로 ‘노동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정책의 정당성은 결과로 심판하면 된다. 다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처럼 노조를 사회악으로 지목하고 공권력 동원을 불사하는 등 신념으로 보수적 노동개혁을 추진할 요량이 아니라면 새 정부 역시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문제 접근은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전례 없이 광범위했던 박근혜식 노동개혁의 정점은 ‘2015년 9월 노사정 대타협’이다. 근로시간을 단계적으로 주 52시간으로 줄이고, 임금체계를 직무와 숙련을 기준으로 개편하는 등 비정규직ㆍ노동시간ㆍ임금제도ㆍ산업재해와 고용보험 등 합의된 항목만 104개다. 노동유연화의 끝판왕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나왔지만 지금도 제대로만 이행됐다면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였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합의에 참석했던 한국노총이 석 달 만에 탈퇴하며 백지화됐지만 실패의 근인은 박근혜 청와대의 과욕이었다. 노사가 합의하지도 않은 파견법 개정이나 양대 지침(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변경 완화) 같은 의제들을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기정사실화하고 무리하게 여론전을 펴면서 노동계의 설 자리를 좁혔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노동계 인사는 “합의가 이뤄지자 경제ㆍ산업계에서 좀 더 화끈한 유연화 정책은 없는지 불만을 표시했고, 박근혜 청와대가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고 했다. 합의를 폐기했던 김동만 당시 한국노총 위원장이 지금도 ‘무신불립(無信不立)’을 강조하는 이유다.
윤석열 당선인의 노동관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노동이사제, 공무원ㆍ교사 노조 타임오프제 찬성 등 그가 이전 보수정부인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보다는 탈이념적이고 중도적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전체 근로자의 4%를 대변하는 강성노조는 치외법권”이라면서 엄연한 사회적 대화의 당사자인 노동조합에 적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2015년 노사정 대타협의 과속이행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을 중용하고 있다. 새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