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인생이 광야 같기에 이에 위안을 주고 깨우쳐 주는 책들이 서점가에는 인기다. 우리는 누군가가 인생을 잘 설명해 주길 바란다. 불확실하기에 당연히 불안하며, 당연히 답을 원한다. 찢기고 상처 입은 자에게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인생의 지도를 확실히 보고 싶듯이 신앙인도 하나님을 잘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을 알 수 있을까? 인생을 알 수 있을까?
성서는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확신 찬 조명을 한다. 특히 구약성서 시대에는 좋은 신심이 인생의 복락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를 사랑의 매로 여겼다.
누구든 긍정하는 바다. 인생의 쓴 경험은 미래를 위한 값진 자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을까?
성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터져 나온 탄식을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홀로코스트의 살육 아래 많은 유대인이 침묵하는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했다. 눈앞에서 자기가 전도한 신앙인 가족이 끓는 물에 삶아지는 것을 보고 더는 버티지 못해 수도복을 벗은 선교사도 있었다.
이처럼 극단적이지 않아도 분명 회색 지대는 존재한다. 성경은 탄식을 지나 불가지론마저 인정한다. 인생을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 있게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지를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 대한 확신과 회의, 이 두 전통은 성서 안에서 충돌하지만 사실 변증적이다. 이는 확신을 갖는 자만을 견제하고 이론으로만 인정되는 삶의 지혜를 벌거벗긴다. 인생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인간의 현실에 부적합하다. 이처럼 삶의 지혜는 지속해서 도전받고 수정된다. 신이 아니라 신에 대하여 말하는 인간의 모든 담론은 어느 것도 확실할 수 없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길 원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경고한다. 신이 인간에 의해 이해되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신은 인간의 지력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신비와 초월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의 회의주의는 하나님을 단순한 이해로부터 탈출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불가해성과 자유를 안전하게 지킨다.
성서의 지혜는 인생도 섣부른 공식에서 탈출시킨다.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함부로 정의할 것이 아니며, 모른다고 좌절할 것도 아니다. 자유한 인생을 우리는 경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