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루는 수백 가지 우연들, 그 경이로움을 만나는 연극

입력
2022.03.25 04:30
12면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에스키모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개나 된다고 한다.” 싸락눈, 함박눈, 폭설, 눈사태. 한국어도 눈을 뜻하는 단어가 적지 않다. 온통 눈밭에 사는 에스키모들이라면 수백 개는 좀 많다는 생각은 들지만 충분히 세분화된 눈에 대한 단어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하 ‘눈을 뜻하는 단어’)은 북극으로 탐험을 떠나는 10대 소녀 로리의 특별한 로드무비 형식의 작품이다. 연극에서는 앞서 언급한 문구가 몇 차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 에스키모의 언어에 눈을 뜻하는 단어가 그렇게 많지 않다. 많이 잡아도 10개 안팎이라는 것이 검증된 사실이다. 그리고 에스키모라는 말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양키나 조센징, 쪽바리처럼 비하가 담긴 단어이기 때문에 사용해선 안 된다. ‘인간’을 의미하는 ‘이누이트’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눈을 뜻하는 단어'의 주인공 로리는 위와 같은 북극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지리 교사인 아빠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북극 탐험이 꿈이었던 아빠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로리는 아빠의 갑작스러운 부재도, 이를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추모 방식도 납득할 수가 없다. 로리는 아빠가 부재한 서재에서 남겨진 일기와 자료들을 통해 아빠가 꾸준히 북극 탐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는 아주 오랜 시간 꼼꼼히 준비만 하다 결국 북극에 가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와 다툰 로리는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 탐험 길에 나선다.

'눈을 뜻하는 단어'는 일인극이다. 로리가 아빠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닥친 특별한 여행 경험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관객들은 갑작스러운 부고와 어색한 장례식 풍경, 엄마와의 불화, 아빠의 서재에서 발견한 북극 탐험 준비 흔적들, 그리고 북극을 향한 여행길에서 본 풍경이나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로리의 친구가 되어 듣게 된다. “흰색은 색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득 차 있다는 것”이나 백야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빛의 향연 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덤이다.

이 연극은 배우의 연기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약간의 소품과 음향 그리고 조명, 영상 등이 빙하 등 여행 중 만나는 풍경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며 이야기를 돕는다. 하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온전히 배우 자신이다. 배우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로리와, 이야기 속 다양한 인물이 되어 흥미진진하게 경험담을 전달한다. 유주혜, 송상은 두 배우가 각각 로리를 맡아 100분간의 북극 탐험 여행기를 책임진다. 필자는 유주혜의 공연을 보았다. 명랑한 10대 친구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빠르고 유연하게 여러 성별과 나이대의 인물로 스며드는 솜씨가 능수능란했다.

우여곡절 끝에 로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북극 상공에 다다른다. 아빠의 뼛가루를 뿌리지만 그렇게 북극에 가고 싶어했던 아빠는 북극의 중심에 내려앉지 못하고 흩어지면서 공중을 떠돈다. 그때 로리는 깨닫는다. 만약 그중 무엇 하나가 어긋났어도 북극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아빠가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서재에서 아빠의 기록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엄마와 다투지 않았다면 북극점 위에서 아빠를 보내줄 수 있었을까. 아빠 역시 수많은 우연을 통해 그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북극에 왔다. 그 과정이 안타깝기보다는 경이롭다. “얼마나 작고 많은 우연이 만나 지금이 되었는지, 무척 놀라운 일이다.”

지금 여기 인생에 이르는 우연의 조합들은 수백 개가 아닌 수억만 가지일 것이다. 그런 인생의 여정을 함의하는 뜻에서 제목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다른 의미로 여전히 유효하다.

연극 '눈을 뜻하는 단어'는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5월 1일까지 공연한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