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식량 위기가 현실로 닥쳤다.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며 주요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온 우크라이나와 세계 최대 밀 수출국 러시아가 전쟁의 수렁에 빠진 지 한 달 만이다. 밀과 보리 가격은 20~30%나 뛰었고, 경작에 필수적인 비료값 역시 40%나 급등했다. 전쟁의 화마가 총과 포탄에 의한 인명피해는 물론, 대규모 기아 사태라는 인류 재앙으로 돌아오는 분위기다.
20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주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식량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개전(開戰) 이래 밀 가격은 21%, 보리 가격은 33%나 치솟았다.
유럽의 곡창지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탓이다. 지난해 전 세계 수출에서 우크라이나산(産) 밀과 보리 비중은 각각 12%, 18%에 달한다. 러시아까지 포함할 경우 27% 23%까지 뛴다. 그러나 이들 곡물은 전쟁 발발과 이에 따른 각국의 제재 등 영향으로 시장에 풀리지 못한 상태다. 작물 생육의 핵심인 비료 가격도 침공 이후 40%나 뛰었다. 세계 최대 비료 수출국인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서방의 제재 대상에 오른 영향이다.
물가 상승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곡물 가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물류 마비와 일부 지역의 자연재해 여파로 지난해부터 줄곧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예기치 못한 전쟁 발발은 가격 상승에 부채질을 한 꼴이 됐다.
식량 불안은 유럽만의 일이 아니다. 극빈국은 기아 위기 앞에 놓였다. 아프리카 소말리아, 베냉, 이집트, 수단 등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밀 수입 의존도가 70%에 달한다. 아르메니아와 몽골, 카자흐스탄은 밀 전량을 두 나라에서 수입해 왔다. 이들 국가는 이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연료 가격 급등으로 기초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는데, 식량 부족 문제까지 직면한 셈이다. 유엔은 이달 초 “전쟁이 세계 식량시장에 미치는 여파만으로 760만 명에서 1,310만 명이 추가로 기아로 내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큰 문제는 식량 가격 상승의 끝을 모른다는 데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 경작지의 30%가 전쟁터로 변했다. 중요한 파종 시기를 놓친 것은 차치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나라를 떠나면서 농사를 지을 인력이 남아있지 않다. 지난 11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에 연료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쟁으로 연료가 군수용으로 전환되면서 농업에서 쓸 재고가 바닥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식량문제가 빈곤 국가 정정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저소득국에선 1970년대 이후 식량가격이 올라 민생고가 악화하면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스코티아뱅크의 벤 이삭슨 농업분석가는 “이들 국가에서 국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촉발한 것은 다름 아닌 식량 부족과 식품 가격 인플레이션이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시작한 잔혹한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개발도상국 국민을 죽음과 가난으로 몰아넣는 것은 물론, 일부 국가의 정치 판도까지 뒤흔들 거라는 얘기다.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상황은 말 그대로 재앙 위에 또 다른 재앙이 더해진 것”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은 없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