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무기지원과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 동참을 촉구했다. ‘중재자’를 자임하며 미국과 러시아 사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스러운 역사인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까지 꺼내 들며 도움을 호소했다.
20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를 대상으로 10분간 화상 연설을 진행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인 2월 24일은 1920년 나치의 창당일이기도 하다”면서 “나치 창당 102년이 되는 날 러시아의 침공 명령이 있었고, 이후 수천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개탄했다. 이어 “우리 국민은 유대인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와 시민을, 문화와 아이들을 파괴하려는 정당화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 비난했다.
또 “러시아는 나치당이 유대인 몰살을 계획하며 썼던 ‘최종 해법(final solu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다”면서 “80년 전 우크라이나는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 이제 이스라엘이 결단을 내리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때”라고 강조했다.
유대인 역사상 가장 끔찍한 시기까지 언급하면서 민간인에게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러시아의 만행에 공감을 얻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스라엘은 그간 우크라이나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유대계 혈통을 두고도 반겨왔다. 다만 자국을 적대시하는 이란 및 시아파 세력 등과 싸우기 위해 러시아와도 협력하고 있다. 때문에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에도 비교적 조심스러운 대응을 해왔다.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의 방공망 등 무기 지원 요청을 거부해왔고, 서방의 대대적인 대러시아 경제제재 조치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이 최고라는 건 누구나 안다. (방공망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람과 우크라이나의 유대인을 구할 수 있다”며 무기 지원을 촉구했다. 또 “우리가 왜 이스라엘의 무기를 지원받을 수 없는지, 왜 이스라엘이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며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답하고 이 질문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접촉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할 수는 있지만, 선(善)과 악(惡) 간의 중재 시도는 실수”라고 말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연설이 이스라엘 주요 방송과 수도 텔아비브 공공 광장에서 생중계됐다고 전했다. 많은 군중들은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며 지지를 표했다. 반면 이스라엘 의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원격으로 연설을 시청했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독일, 폴란드 의원들이 의회에 모여 화상 연설을 듣고 기립 박수를 쳤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와 관련 NYT는 “푸틴 대통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균형감’을 잡으려는 베네트 총리의 행동과도 같았다”고 평가했다.